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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敏公 徐弼 良景公 徐愈 兩先生生涯思想

 

金 時 晃 <慶北大>

 

1. 머리말

 

利川徐氏箕子42世孫 箕準利川 徐河城隱居부터 그 後孫徐氏가 되었다 하며, 或說에는 余守己穢國酋長으로 아홉 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들이 여러 分居하여 衆人에게 많은 을 베풀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余字를 붙여 徐字稱姓하였다고도 하며, 一說에는 百濟 義慈王 太子餘隆敗戰하고 나라에 갔을 때, 나라에서 餘隆餘字徐字로 고쳐 賜姓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 箕準後孫說信憑할만하다.

위와 같이 利川徐氏始祖 本貫由來에 관한 세 가지 이 전하고 있으나, 모두 確實證據가 될 만한 文獻上의 기록은 없는 것 같다. [利川世獻 世系圖] 에는 始祖本貫由來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始祖 徐神逸新羅 孝恭王 阿干을 지내다가 國運이 다함을 알고 利川孝養山麓隱居하면서 自稱 處事라하고 後進養成에 여생을 바쳤다. 그리하여 시조 隱居地利川本貫으로 하였다. 京畿道 利川郡 夫本面山村里 孝養山에 있고 每年 101일에 祭享한다 하였다.

歷代 重要 人物로는 始祖의 아들인 고려 光宗朝 太師 內議令 徐弼, 그 아들 高麗 成宗朝 名臣 內史令 章威公 福川 徐熙, 그 아들 高麗 顯宗 德宗朝名臣 三重大匡 內史令 元肅公 徐訥, 高麗末 贈 大司諫 淸白吏 麗窩 徐甄, 朝鮮 太宗朝 功臣 禮曹判書 良景公 臨江 徐愈, 壬亂功臣 戶曹參議 慕庵 徐思迪, 그 아들 丙子 倡義功臣 監役 龜峯 徐仁元 등 다 言及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 이 정도로 記錄한다.

先代에는 모두 京畿道 利川 地域을 중심으로 世居한 것 같고, 慶州에 처음으로 入鄕한 이는 良景公 徐愈 先生曾孫 司正 徐碩孫인데 慕庵 徐思迪 先生高祖이고, 成宗朝 參勳府會盟이라 世系圖에 기록되어 있다. 이 때부터 자손들이 慶州地域世居해 온 것으로 짐작된다.

[利川世獻]에 있는 利川徐氏上系圖主要人物은 아래와 같다.

 

始祖 徐神逸 : 新羅 阿干大夫

: 高麗太師 內議令 貞敏公 配享 光宗廟庭 享 龜山書院

: 號 福川 高麗太保 內史令 諡號 章威 封 利川君 配 崇義殿 享 雪峯書院

: 高麗太師 內史令 諡號 元肅 配享 靖宗廟庭

一世 惟偉 : 文科 掌冶署令. <按參攷年代則 章威公以後 派系疑有失傳 故自掌 冶公 起代云>

二世 冕 : 軍器寺 主簿

三世 嶙 : 文科 正義大夫 判大府事

四世 瓚 : 朝顯大夫 禮賓尹

五世 諲 : 文科 司憲府執義 安文成公 薦授國子敎授 後退去衿川樊塘里 號遯翁

: 文科 掌令 我朝 贈大司諫 封忠臣墓 享衿川 忠賢書院

六世 勗 : 衛尉寺丞 贈左承旨 父諲

七世 孝孫 : 判司宰監事 贈吏曹判書

八世 愈 : 我太宗朝 禮曹參判 策佐命勳 封利城君 贈禮曹判書 諡良景 享龜山書院

九世 敬興 : 黃州牧使

十世 眉壽 : 司直 景泰間

十一世 碩孫 : 司正 始居 慶州 成宗朝 參勳府會盟

十二世 世英 : 秉節校尉 中宗朝 參勳府會盟

世豪 : 迪順校尉 副司果 子希顔

十三世 希顔 : 宣略將軍 忠佐尉 副司勇

十四世 得天 : 號 峴南 御侮將軍 忠佐尉 副司勇 壬辰殉節 贈禮賓寺正

十五世 思遠 : 壬辰殉節 無嗣 女 鄭四勿 生員

思迪 : 號慕庵 壬辰倡義 贈戶曹參議 從享 龜山書院 子 從彦 遵彦

思道 : 號 思庵 子 一元 一會

十六世 從彦 : 贈 工曹參判 封利興君

遵彦

一元 : 初諱 仁元 號 龜峯 生員 丙子倡義 除繕工監役 從享 龜山書院 子 再興 再昌 再亨 再泰

正宗 10年 丙午(1786) 東都士林 建祠于龜山下 號曰龜山社 廟曰象忠 門曰由義 東西兩齋曰風興日新 大司憲 丁範祖 撰定 正堂曰濟樂 都正睦萬中 撰定 扁額 皆判書 曺允亨書

憲宗 14年 戊申(1848) 道儒議 陞社號 龜山書院 以先生八世孫 監役 龜峯公一元 從享

龜山書院 重建推進委員會 徐炳玉 委員長中心으로 慶州 儒林과 자손들의 誠力에 의해, 지난 57慶州市 현곡면 하구 2리에 龜山書院重建되어, 貞敏公 徐先生 逝去 1040인 지금에야 祭享하기 始作하였다.

 

 

2. 貞敏公 徐弼 先生

 

1) 선생의 生涯

 

貞敏公 徐弼 선생은 新羅 孝恭王 5辛酉(唐 昭宗 天復 元年 901)出生하여 高麗 太祖惠宗 定宗 光宗 4대에 걸쳐 벼슬하여 나라에 큰 功績을 남겼다. 本貫利川이며 始祖新羅 阿干 神逸이다.

父 神逸新羅 阿干大夫羅末弟 神通과 함께 孝養山 아래에 退去하여 生徒들을 敎授하고 있었다. 하루는 獵者의 화살에 맞은 사슴을 숨겨 구해 주었는데 꿈속에서 蔭德으로 의 도움을 받아 80 高齡을 낳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性品通達하고 敏捷하여 刀筆이란 벼슬을 시작으로 여러 번 進級하여 太師 內議令까지 올랐다.

선생은 光宗 16乙丑(965) 7월에 하여 享年 65세였다. 諡號開國 貞敏公이라 하였고, 여러 번 贈職이 내려 三重大匡 太師 內史令이 되었으며, 뒤에 光宗 廟庭配享하였다. 慶州 현곡 龜山書院祭享. 아들 廉凞 英凞가 있는데 各自이 있다.

 

2) 儉素節約紀綱確立

 

高麗 光宗宰臣王咸敏皇甫光r先生에게 술잔을 下賜하였는데, 선생은 홀로 받지 않고 말하기를 이 옳지 않게 宰輔의 자리에 있어 猥濫되게도 지나친 恩寵을 입고 있는데, 금 술잔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두렵고 分數에 지나친 것입니다. 또한 服用等差를 분명하게 해야 하고, 奢侈儉素理亂에 관계되는 것인데, 臣下술잔을 使用한다면 임금은 장차 무엇을 使用하시겠습니까하였다.

그래서 光宗寶物寶物로 여기지 않는 淸白吏의 정신을 가졌으니, 主張奢侈儉素理亂關係되는 것이라는 말을 보배로 삼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奢侈浪費絶對 排擊해야 한다는 뜻도 있지만 君臣上下間 等差를 분명히 함으로써 官吏紀綱嚴格確立해야 한다는 것이다. 官吏들의 기강이 解弛하면 정치가 紊亂해지고, 임금과 大臣들이 奢侈하면 나라가 한다는 것은 古今 不變의 이치이므로, 선생은 임금과 大臣들의 奢侈를 가차없이 엄히 排擊 遮斷하려는 意志를 보여 준 것이다.

 

3) 信賞必罰主體性 確立

 

선생은 임금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陛下께서는 이 없는 사람에게 을 주지 마시고, 이 있는 사람을 잊어버리지 마소서하니 光宗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近臣을 보내어 이 있는 사람과 이 없는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가 물었다. 대답하기를 이 있는 사람은 元甫寔會이고 이 없는 사람은 너의 무리들이다, 하므로 近臣이 이대로 아뢰었다.

政治要諦信賞必罰原則嚴正히 하여야 하는 것이다. 나라의 大事를 끝낸 뒤 論功行賞을 잘못한 탓으로 不平不滿澎湃하여 結局 反目背叛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歷史的 사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없는 때가 없었다. 權力周邊에서 阿諂이나 하는 近臣들과 淸廉하고 正直忠臣들을 바르게 區分하지 못하는 임금이야말로 庸君暗主라고 하는 것이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絶對 權力 앞에는 阿諂을 잘하는 奸邪한 무리들이 모여들어 임금의 비위를 맞추므로, 임금은 그들을 믿고 사랑하기 쉽고, 忠直臣下들은 임금에게 直言으로 諫爭을 하기 때문에 임금이 멀리 하고 싫어하기 쉬운 것이다. 이것이 쌓이면 정치가 바로 서지 못하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니 선생은 그낭 보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 光宗投化漢人들을 厚待하여 臣僚들의 第宅 를 골라서 그들에게 주었으므로, 하루는 선생이 아뢰기를 이 사는 집이 좀 넓으니 바치고자 하나이다하였다. 이 그 까닭을 물으니까 대답하기를 지금 投化한 사람들을 官吏選擇하여 벼슬을 주고, 집을 주어 살게 하니, 世臣古家들은 도리어 살 곳을 많이 잃었습니다. 의 생각으로는 子孫들을 하여는 宰相들의 第宅은 그 所有가 아니라고 생각되오니, 이 있는 동안에 취하소서. 祿俸의 나머지를 가지고 다시 작은 집을 지어 후회가 없도록 하겠습니다하였으므로, 임금이 하였지만 마침내 感動하고 잘못을 깨달아 다시는 臣僚들의 第宅을 빼앗지 않았다.

中國에 대한 事大 慕華思想은 옛날부터 있어 왔겠지만 高麗時代부터 심화된 것이 아닌가 斟酌된다. 漢文化崇尙하며 漢人優待하는 것은 民族 自尊心에 관한 문제이다. 귀화한 漢人들에게 벼슬을 주고, 世臣들의 第宅을 빼앗아 주어 살게 하며, 女子까지 妻妾으로 준다는 것은 그냥 보고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선생이 이것을 시정하려고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4) 人本主義

 

內廐馬가 죽었는데, 임금이 主管者를 죄 주려고 하였으나, 선생이 孔子不問馬引用하여 諫爭하여으므로 맡은 사람이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正直하고 바른말을 임금에게 거침없이 하였다.

王家室에서 길러 사용하는 內廐馬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어찌 사람에게 비길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이고, 나라에서 왕이 가장 사랑해야 하는 것은 백성이다. 愛民精神이 없는 임금은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孔子의 말을 묻지 않음을 들어 諫爭하는데 있어서야, 이라고 생각을 굽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3. 良景公 徐愈 先生

 

1) 良景公生涯業績

 

良景公 徐愈 先生遠之 또는 兼之이며, 利川人으로 始祖徐神逸이다. 선생의 家系는 앞에 보인 것과 같다. 直提學 昌寧 曺繼芳이다.

선생은 高麗 恭愍王 5丙申(1356)衿川 樊塘里에서 出生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슬기가 英敏하여 번거롭게 督勵하지 않아도 學問에 힘써 6文理를 얻었으며, 점점 자라면서 詩書에 통하고 諸子 傳記를 모두 자세히 이해하였다. 年譜를 중심으로 生涯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0: 恭愍王 14乙巳(1365) 孝養山 始祖 阿干公 山所省墓하고 感動하여 다음의 一絶을 읊었다. 는 다음 先生詩文에서 言及한다.

31: 禑王 12年 丙寅(1386) 登文科 史傳曰 蚤喪父母 不及營養語及則 必涕泣云 蓋先生 天性篤孝 將欲爲貧 祿仕之意可知而 丁考妣憂 年月未詳

37: 朝鮮 太祖 元年 壬申(1392) 7太祖寶位에 오르자 曾祖 掌令公 諱甄圃隱先生을 당했기 때문에 杜門洞으로 들어갔으므로 衿川 樊塘里遯居하여 樊溪라 하였다. 그리고, 國史에 말하기를 坐不北向 終身不對 漢陽城郭하는 마음과 태도로 아래의 를 지었다 한다.

 

千載神都隔杳茫 천년의 신의 도읍 아득히 격했는데

忠良濟濟佐明王 충량한 제제다사 밝은 임금 도왔다네

統三爲一功安在 통합삼한 공훈은 어느 곳에 있는고

卻恨前朝業不長 전조의 왕업이 길지 않다 한탄 마라

 

를 보고 臺諫들이 鞫問 治罪할 것을 하자 太宗이 말하기를 高麗臣下我家를 향해 北面을 하지 않고, 그 임금을 追慕하는 것은 伯夷叔齊와은 무리이니 어찌 죄를 줄 수 있겠는가 하였다.

39: 太祖 3年 甲戌(1394) 9世子右弼善 被徵 太祖親書敎旨徵之. 太宗潛邸時부터 선생을 만나보고는 선생의 器量에 대해 매우 奇異헤게 여겨왔으므로, 늘 일이 있을 때마다 訪問하여 물었다. 선생 또한 感激하여 太宗을 여러 면으로 잘 도왔다.

44: 定宗 元年 己卯(1399) 正月 門下府 就職. 上疏하여 史官으로 經筵入侍하도록 . 疏略曰 前朝之季 荒淫無度 昵比婦寺 疏遠忠良 憚史官直書 使不得近 最爲無藝. 5月 論劾 李居易 李佇父子 瀆亂之罪 忤旨 逮獄免官 未幾復職

45: 定宗 2庚辰(1400) 進拜 承政院 右副承旨 平朴苞亂 時知中樞朴苞 定社錄勳後 自以功多居下 怏怏不平 陰誘 懷安君芳幹 稱兵向闕 鷄林君李來奔告 先生與義安君和等 詣邸擁太宗上馬 使安山郡守李叔蕃 先登力戰 懷安敗走 太宗恐懷安之遇害 連呼勿犯吾兄也 軍人追執之 懷安曰 誘我者朴苞也 遂誅苞 安置懷安于兎山, 42癸丑 論劾 參判三軍府事 趙英茂 流于黃州. 知三軍府事 李天祐 參贊門下府事 趙溫罷職. 6爲左輔德 陪讀書筵 論握兵之弊. 8爲左散騎 孟思誠右散騎. 10上疏諫 停溫泉行幸. 12請罷 大司憲 鄭矩 中丞 金九德 等職.

46: 太宗 元年 辛巳(1401) 正月 策勳受翊戴佐命功臣號 嘉靖大夫 封利城君 尋加推忠號. 2同佐命諸功臣會盟.

47: 太宗 2年 壬午 9召拜豊海道觀察使. 12特除 集賢殿 直提學 兼判內資寺事.

52: 太宗 7丁亥(1407) 7上疏請閔無咎 閔無疾(太宗妻男) 辛克禮等罪

53: 太宗 8戊子(1408) 524太上王 昇遐 詣闕哭 臨成服時 喪禮廢壞 考據禮典 定行三年之制以進. 9命刻 功臣爵名于 健元陵碑陰.

54: 太宗 9己丑(1409) 916乙酉 爲太一奉安使 太一殿 在 慶尙道 義城郡 氷穴傍 每歲上元 遣禮曹 降香以祭 成化 11(成宗 61475) 移忠靑道 泰安 出輿地勝覽. 917丙戌 承命 抄錄大學衍義 齊家之要以進 上欲 以大學衍義 后夫人 可法可戒之事 令中宮及世子淑嬪以下 皆誦而習之 命書二冊. 10陞資憲大夫 禮曹判書 上命畵師 繪眞影 藏于忠勳府 一本賜本第. 11奉命如京師 謝賜綵幣 仍進征馬萬匹.

55: 太宗 10庚寅(1410) 2還自京師 復命進對. 4承命 論文昭殿

祝板書法 詳考舊制以聞. 詳定 鋪馬起發之制. 5爲太祖祔廟 都監提調. 66辛丑 上狀辭乞歸 上不允 復封利城君

56: 太宗 11(1411) 420庚戌 獻壽于廣延樓 盡歡而罷. 64癸巳 考終于正寢 訃聞 上震悼 遣中官致祭 輟朝三日 賜賻如儀 賜諡良景 <溫良好樂曰良 由義而濟曰景 禮葬于驪州品谷 象頭山北鹿 壬坐之原

太宗 13年 癸巳(1413) 九月 初二日戊寅 大司憲尹向 上疏請 開國定社佐命三功臣 賞賜田令世食 嘗啓達 蒙允

宣祖 元年 戊辰(1568) 特命 不祧于家廟

正宗 10年 丙午(1786) 東都士林 建祠于龜山下 號曰龜山社

正宗 11年 丁未(1787) 11月 下丁 奉安影幀

憲宗 14年 戊申(1848) 道儒議 陞社號 龜山書院 以先生八世孫 監役 龜峯公一元 從享

 

2) 先生遺文

 

선생의 文集으로 臨江先生文集 上下 二卷이 있지만 大部分 남의 글이고, 선생 自作의 글은 매우 적다. 文集에는 한 편만 있고 年譜에 한 편이 보인다. 그리고 上疏文 몇 편과 啓 一篇할 뿐이다.

 

(1)

 

孝養山省始祖墓 在利川

 

孝養山坻始祖起 효양산 아래에 시조께서 일어나

有鹿帶矢匿衣中 화살 맞은 사슴을 옷 속에 감추므로

積善餘慶流萬歲 적선하여 남은 경사 만세에 흘러내려

子孫相繼位三公 자손들 이어가며 삼공에 올랐다네

 

年譜에서 보인 것과 같이 이 시는 先生 10세 때인 恭愍王 14乙巳(1365) 孝養山 始祖 阿干公 山所省墓하고 感動하여 지은 것이다. 선생의 從孫 大司成 諱岡은 이어서

 

先世操心活神鹿 선세에 마음써서 신록을 살렸으니

福慶綿綿流後裔 후손에게 복과 경사 면면히 이어지네

 

라고 하였다. 內容詩想은 거의 같다. 화살에 맞아 傷處를 입은 사슴을 잘 치료하여 살려 주었다는 事實은 가끔 있는 美談이다. 그러나 80세에 生男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점이 있기는 하다. 하늘이 感動하였다고 하겠다. 믿고 안 믿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와 같은 精神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이 注目할만한 점이다. 사슴은 짐승이기에 잡아먹더라도 누구도 비난하거나 잘못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지만, 傷處입은 사슴을 잡아먹지 않는 것은 仁者의 마음이다. 仁者의 마음은 참된 人心이다. 人心은 사람을 眞心으로 사랑하게 된다.

天心이며 의 바탕이므로, 天性 本性대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本性 天性仁義禮智信實踐하는 이는 聖人이고 賢人이며 聖人賢人의 길을 가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子孫들을 잘 가르치게 된다. 子孫들에게 權力이나 財産을 많이 물려 준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잘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千餘年을 내려오면서 복을 받고 慶事가 거듭됨과 동시에, 벼슬 또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다음은 처음에 衿川 樊塘里遯居하여 樊溪라 하고, ‘坐不北向 終身不對 漢陽城郭하는 마음과 태도로 지은 年譜 37歲條에 보인 것과 같은데, 그 후에 마음과 태도를 變更하여 朝鮮朝에 벼슬하기 시작한 듯하다.

 

(2) 散文 疏

 

請史官始令入侍經筵疏

 

年譜에서 간단히 言及한 것과 같이, 선생 44定宗 元年 己卯(1399) 正月 十五日史官으로 經筵入侍하도록 한 것이다.

 

史官之職 人主言動 時政得失 直書不諱 以詔後世 所以備觀省垂勸戒也 前朝之季 荒淫無度 昵比婦寺 疏遠忠良 憚史官直書 使不得近 最爲無藝 宜鑑前朝之失 思設官之義 特令史官 日侍左右 記言動 錄時政 以爲萬世之弘規

 

史官職分은 임금의 말과 행동, 時政得失을 거리낌없이 바르게 써서, 후세에 남겨 가지고, 그것을 보고 살피게 함으로써 좋은 것은 勸獎하고 나쁜 것은 警戒하도록 해야 한다. 高麗末에는 임금이나 官吏들이 모두 酒色에 빠져서 사람으로서 해야할 도리를 돌아보지 않고, 아첨하는 奸臣輩를 가까이하고 어질고 정직한 忠臣을 멀리하며. 史官의 곧은 글을 꺼려 가까이 할 수 없게 하였으니, 가장 規範法度가 없었다. 그러니 前朝失政을 거울삼아 史官을 두는 뜻을 생각하여, 특별이 史官해 매일 左右에서 모시고 말과 행동 및 時政을 기록하여 萬世의 크나큰 規範이 되게 하라 하였다.

 

請罪趙英茂 趙溫 李天祐等疏45때인 定宗 2庚辰(1400)庚辰 四月 初二日의 것인데, 同日再疏 三疏를 거듭 함으로써 결국 趙英茂黃州流配시키게 하였다. 이어서 같은 해 十月 初十日請停行幸溫泉疏十二月 十五日請鄭矩金九德等罷職疏를 하였으며, ‘請罪李居易及其子佇疏’ ‘請罪閔無咎閔無疾辛克禮等疏’ ‘再合疏’ ‘三疏始疏不傳 再疏’ ‘又請罪辛克禮疏’ ‘請罪李茂等疏가 있다. 로는 論史官隨行獵所啓’ ‘請勿令召還李佇啓’ ‘請勿給李佇告身啓’ ‘又啓등이 전하나, 일일이 다 내용을 分析하여 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러上疏文을 대강 살펴보면 모두가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한 正義實現目標로 목숨을 걸고 鬪爭한 내용뿐이다. 목숨을 걸고 함께 힘을 합하여 싸우던 功臣들이라 하더라도, 처음과는 달리 正義를 버리고 私利私慾으로 치닫고 있다면, 前日私情에 얽매어 彈劾하여 물리치지 않고 견딜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 목숨을 걸고 鐵石같은 信念으로 鬪爭한 것이다. 上疏文 들은 우리 나라 政治史에 길이 빛날 뿐만 아니라, 앞으로 人類 歷史上에서도 永遠龜鑑으로 삼아야 하리라 생각된다.

 

3) 史傳短評 卒記

 

史傳曰 六月初四日癸巳 利城君徐愈卒 字謙之 自號臨江 建文辛巳 以庚辰之功 受翊戴佐命之號 丙寅及第 歷至禮曹判書 庚寅復爲利城君 卒年五十六 諡良景 上遣中官致祭 輟朝三日 愈不事家産 以詩酒爲娛 蚤喪父母 不及營養語及則 必涕泣 又敎子弟曰 友其大夫士之賢者 勿與愚不肖相從 其執心槩如此也 子敬興黃州牧使 思川戶曹佐郞 揚根

 

 

4. 맺는 말

 

新羅末 利川徐氏 始祖 徐神逸 公孝養山 아래서 蔭德을 베풂으로써, 高麗初 名宰相 內議令 貞敏公 徐弼 先生出生以來 五百餘年 동안 積善餘慶流萬歲하였으며 子孫相繼位三公하여왔다. 그리고 高麗末 朝鮮初中興始祖 良景公 徐愈 先生이 나타나서 朝鮮 初期 混亂相克服하고 五百年 國基를 튼튼히 하는데 赫赫功勞를 세운 것은 결코 偶然이 아니라고 본다.

이와 같이 500年 前後 兩先生生涯思想, 그리고 겨레와 나라의 발전을 위해 이룬 功績이 거의 一致한다고 하겠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을 바탕으로 한 人間本性을 그대로 지키면서 天理에 따라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根源이 깊은 물은 절대로 마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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