咸安趙氏 十三忠 事跡에 대하여
金時晃 (慶北大 名譽敎授)
1. 머리말
咸安趙氏 始祖 元尹公 諱 鼎은 陜川에 雄據한 豪族으로서 義兵을 일으켜 高麗 太祖를 도와 古昌城(安東) 東京(慶州)에서 後百濟 甄萱을 물리친 公으로 開國壁上功臣 大將軍이 되었고, 中祖 貞節公 漁溪 先生 諱 旅는 端宗 元年에 進士試에 合格하여 成均館 太學生이었으나, 端宗이 世祖에게 讓位하였을 때 不事二君의 節槪를 지켜, 다시 應試하지 않고 洛東江上 伯夷山아래 隱居하여 終身토록 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함으로써 梅月堂 金時習 선생과 함께 仁을 求하여 仁을 이루었다고 하였으며, 사람들이 모두 端宗 節義 生六臣 中의 한 분으로 稱頌하였다.
漁溪 선생의 뒤를 이어 三世孫 諱 壽千, 四世孫 諱 鵬 坦 垹, 五世孫 宗道 信道 敏道 俊男 凝道 益道 善道 亨道, 六世孫 繼先 등 열 세분이 六代에 걸쳐 靖國하였거나 死敵 却敵 또는 勤王으로 生死는 다르지만 나라에 忠誠을 다한 것은 同一하였다. 그래서 이분들을 咸安趙氏十三忠이라 한다. 이 분들의 빛나는 정신과 참된 삶을 다시 살펴봄으로써, 이를 배우고 본받아 오늘과 미래의 올바른 삶을 營爲하게 하고자 한다.
2. 咸安趙氏 十三忠
1)節度公 趙壽千
선생은 成宗 壬辰年(1472)에 出生하여 燕山君 癸亥年(1503)에 武科及第하였는데, 天性이 剛直 嚴正하고 容貌가 아름다웠으며 體軀가 壯大하여 무척 勇猛스러웠다. 中宗反正 때 先生은 宣傳官으로 反正 擧事에 참여하여 큰공을 세웠으므로 中宗이 嘉尙히 여겨 原宗一等에 錄券하게 하면서 ‘忠節로써 나라를 바로잡는 것은 臣下의 職分이고, 功을 기록하고 褒賞하는 것은 王者의 도리이다. 國運이 中途에 기울어 宗廟社稷이 위태롭게 되었는데, 다행히 同德한 臣下들이 協贊 推戴하였으니 原從의 功이 있다. 내가 참으로 아름답게 여기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나라에서는 先生의 考를 漢城府 左尹에 贈職하고, 특별히 忠淸兵馬使에 除授하였다가 다시 本道 水軍節度使에 제수하였다.
2)兵曹參判公 趙鵬
先生은 中宗 甲午年(1534)에 出生, 武科에 及第하여 벼슬이 訓練院 副正이었는데, 宣祖 壬辰年에 王을 扈從하여 倭賊과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했으나, 單身 敵陣으로 突進하여 싸우다가 捕虜가 되었다. 公은 敵들의 降伏 勸誘에도불구하고 성을 내어 눈을 부릅뜨고 적을 꾸짖으며 ‘내가 禮義의 나라에 태어나서 어찌 네놈들에게 苟且하게 목숨을 구하겠는가’ 하니까, 적들이 公의 입을 도끼로 찍었으나 끝내 敵들을 罵倒하다가 목숨을 거두었다. 朝廷에서는 戶曹參議를 贈職하였다가 뒤에 다시 兵曹參判을 贈職하고 勳卷에 기록하였다.
3)參判公 趙坦
先生은 明宗 壬子年(1552)에 出生, 宣祖 癸卯年에 武科에 及第하였다. 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公이 靑松에 있었는데 꿈에 先考 參判公이나타나 ‘敵들이 나의 집(무덤)을 해치는데 너는 모르느냐’ 하므로, 놀라 일어나 급히 여러 兄弟에게 전하고, 삼백리 길을 달려 甕谷 山所에 이르러 보니 倭賊들이 墓所를 파서 棺이 드러나 있었다. 公은 先考의 棺을 안고 痛哭하며 눈물이 비오듯함으로, 倭賊들도 孝誠에 감동하여 아무 害도 가하지 않았다. 公은 棺을 메고 헤엄쳐 강을 건너 仁州까지 가서 天生山城아래 安葬하였다.
先生은 國家의 危急함과 先親墓의 罔極한 變을 당한 원수를 갚기 위해 조카 趙亨道와 함께 義兵을 거느리고 忘憂堂 郭再祐 將軍을 따라 火旺山城으로 가서 倭賊을 무찌르고, 忘憂堂이 父親喪을 당해 고향에 돌아갔을 때는 義兵들을 指揮하기도 하였다. 明나라 都督 麻貴가 蔚山에서 苦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 一千을 거느리고 가서 명군과 合勢하여 蔚山城을 지켰다.
前後에 宣武原從勳 二等功臣 訓練院 判官 兼折衝助防將軍의 錄券傳旨를 받았다. 朝廷의 分黨으로 나아가 벼슬할 생각이 없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지내다가 光海 壬子年(1612) 卒하니 享年 61세였다. 仁祖 5년(1627) 兵曹參判의 贈職을 받았다. 愚伏 鄭經世 선생은 詩로써 ‘留意邦家 輕身赴敵(국가를 위해 자기 목숨을 가볍게 여기며 적을 무찔렀다) ’했다고 稱頌하였다.
4)參判 斗巖公 趙垹
先生은 明宗 丁巳年(1557) 咸安 儉岩里에서 出生하여 退溪先生의 門人인 篁谷 李偁선생에게 배워, 일찍부터 道學의 眞理를 깨닫고는 退溪先生의 聖學十圖를 보고 즐거워하며 ‘이것이 나의 스승이다’ 라고 하였다. 壬辰亂이 일어났을 때 선생은 漆園 武陵에 있었는데, 各邑 守令들이 城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을 보고는 ‘國祿을 먹는 자들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집안의 젊은 壯丁 백여 명을 이끌고 忘憂堂 郭再祐 將軍의 鎭營으로 달려갔다. 家兄 判官公 坦과 조카 亨道 東道公등과 함께 火旺山城에서 氣勢를 올리니 敵들이 물러가므로 追擊하여 많은 적들의 목을 베었다. 공은 智略이 兼備하여 無敵將軍이란 稱號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自身의 功을 내세우지 않고 故鄕에 숨어 지냈는데, 사람들이 그 忠節과 孝誠에 감동하여 狀啓를 올려 表彰을 받게 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선생은 놀라 맏아들을 보내어 그 文書를 빼앗아 불사르게 하며, ‘臣下가 나라를 위하고 자식이 부모를 받드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이치이다. 무엇 때문에 표창할 것인가. 내가 죽은 후라도 이란 일이 있으면 일체 금지하고 지하에까지 羞恥를 끼치지 말라’ 하였다. 선생이 詩를 지어 壁에 걸어 두었는데
事親當盡孝 어버이 섬김에는 당연히 효도이고
爲國亦當忠 나라를 위함에는 충성이 마땅한데
嗟我俱無及 슬프다 이내몸은 두 가지 다 못했으니
江湖恨不窮 세상에 한스러움 다함이 없네 그려
라고 하였다. 忘憂堂 郭선생이 이 시를 보고 더욱 稱頌하였다. 仁祖 戊寅年(1638)에 卒하니 享年 82였다. 著書로 [忠孝實鑑] [家訓八箴]이 있으며 贈職은 嘉善大夫 戶曹參判이다.
5)大笑軒 趙宗道
선생은 中宗 丁酉年(1537) 咸安 院北洞에서 出生하였으며 九歲에 鄭斗 선생에게 배워 15歲에 晉州 鄕試에 合格, 明宗 戊午年(1588) 22歲에 生員試에 합격하였다. 宣祖 6년 癸酉(1573)에 成均館의 推薦으로 安奇道 察訪을 拜命하였고 宣祖 丁丑年(1577) 40歲에 宣慰使를 따라 日本 使臣 玄蘇를 會見했는데, 傲慢한 玄蘇에게 詩를 지어 주며 꾸짖으니, 玄蘇가 놀라 再拜하고 그 시를 읽었다고 한다.
宣祖 25年 壬辰(1592) 56歲 때 倭亂이 일어났는데 급히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李魯公을 만나 義兵을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함양에 도착하여 招諭使인 鶴峯 先生을 만나 宜寧假守로 任命을 받아 宜寧에 赴任하였다가 모든 職責을 郭忘憂堂에게 넘겨주고, 李魯 공과 함께 招諭使인 鶴峯 先生을 따라 晉州 矗石樓에 올라 술을 마시며 나라를 위해 죽기를 盟誓하였다.
宣祖 29년(1596) 60歲 때 咸陽郡守가 되었고, 이듬해 丁酉再亂이 일어나자 黃石山城에서 安陰縣監 郭逡公과 함께 加藤淸正(가또오)이 인솔한 倭賊들과 奮戰하다가 함께 殉國하였다.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의 贈職이 내렸고, 諡號는 忠毅公이다.
6)判書公 趙信道
선생은 明宗 9년 甲寅(1554)에 태어났는데, 性品이 剛直하고 智慧가 卓越하여 16세에 詩를 지었는데,
활을 방어산 고개에 걸고 강나루를 달려라
臨安史를 읽었더니 충신이 한두 사람뿐이더라
라고 하여 앞으로 나라 위한 忠臣이 되려는 포부를 나타내었으며, 東漢 馬援의 傳記인 伏波傳을 읽고, ‘말가죽으로 屍體를 싸서 돌아오는 것이 참다운 大丈夫다’ 라고 하여, 文官으로 出世하기보다는 武官으로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뜻을 굳혔다. 그래서 武科及第하여 溫陽郡守가 되었다.
壬辰倭亂이 일어나 大駕를 護衛하였는데, 倭賊들이 길을 막아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으므로 선생은 王에게 아뢰기를 ‘小臣에게 護衛兵 300명을 주시면 목숨을 걸고 막아내겠습니다.’ 하니까 왕이 軍士 300명을 許諾해 주어, 군사를 거느리고 적진으로 쳐들어가서 적의 목을 베고 깃대를 꺾으면서 싸우니까 적들이 도망을 쳤다. 그 틈을 타서 왕은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가 義州까지 避難하였다.
그 뒤 宣祖 28年 乙未(1595) 漢江 전투에서 적을 맞아 싸우는데, 화살이 떨어지고 칼이 부러져서 白兵戰을 하다가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戰死하였다. 宣祖가 訃音을 듣고 말하기를 ‘寡人이 危機를 벗어난 것은 將軍의 힘이다. 漢나라 紀信이라고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라고 하였으며, 특별히 그 해 (宣祖 乙未)에 兵曹判書의 贈職을 내리고 扈聖一等勳이 錄券宣武勳을 내렸다.
7)監察公 趙敏道
선생은 明宗 11년 丙辰(1556)에 출생하였는데, 從兄 大笑軒 선생과 家兄 判書公 세 사람이 意氣가 相通하였다. 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나라의 危機를 구하겠다는 뜻을 굳히고, 夫人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나라가 짓밟혀져 한 자루의 칼을 들고 이를 무찔러 싸우러 나가니 죽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 살아오지는 못할 것이오’ 하면서 머리카락을 잘라서 부인에게 주고, ‘내가 죽거든 이 머리카락으로 先塋下에 장사지내시오’ 하였다.
부인과 斷腸의 슬픔을 안고 걸음을 재촉하여 巡邊使 李鎰의 陣中으로 달려가 그의 部下로서 參戰하였다. 尙州戰鬪에서 10萬이 넘는 倭兵과 싸웠는데 당하지 못하자 軍士들이 도망하기 시작하였으나, 선생은 ‘國家가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서 그 난을 피해 도망하는 것은 臣下의 도리가 아니다’ 라고 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니 宣祖 壬辰 4월 25일, 享年 37이었다. 나라에서 司憲府 監察을 特贈하고 錄勳 旌閭와 함께 租稅減免의 恩典이 내렸다.
8)承旨公 趙俊男
선생은 明宗 2年 丁未(1547)에 출생하였는데, 孝行으로 薦擧 昭格署 參奉이 되었다. 壬辰倭亂에 적들이 밀어닥치는 데도, 避亂하지 않으며 ‘내가 平素에 글을 읽어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도리를 알고 있는데, 비록 책임을 진 官吏들은 달아나고 없지만, 어찌 내 몸과 처자만 保全하는 무리들과 같이 달아나 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宣祖 30년 丁酉(1597)에 倭賊들이 曾祖 僉議公 墓를 發掘하자 공이 敵中을 뚫고 들어가서 흙을 지고 와 棺을 덮으니, 賊徒들이 倭軍 陣中으로 가자고 威脅하자 공이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들은 우리나라를 侮辱하고 先祖의 墓所를 無斷 發掘하였으니 弗共戴天의 怨讐이다. 어찌 너희들의 뒤를 따라가 구차하게 살겠는가’ 하며 無盡亭에서 北向四拜하고는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찌르니 적들이 이 光景을 보고 ‘의로운 사람이다’ 하면서 衣服으로 屍體를 덮어 주고 달아났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無盡亭 밑의 竹筍과 나물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高宗 5년 戊辰(1868)에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의 贈職이 내렸다.
9)固城公 趙凝道
선생은 明宗 20년 乙丑(1565)에 出生하였는데, 어려서부터 肝膽이크고 勇氣가 있었다 한다. 宣祖 16년 癸未(1583) 19歲에 武科及第하여 學問과 武術이 뛰어났음을 보였다. 丁酉再亂 에 先生은 固城 縣令으로서 小數의 部下를 이끌고 城을 死守하기로 결심하고 화살이 다할 때가지 力戰奮鬪하였으나, 수만은 倭賊을 당해내지 못하고 왜적을 꾸짖으며 短刀로 自決하였다. 나라에서는 通政大夫 兵曹參議의 贈職이 내렸다.
10)參議公 趙益道
선생은 宣祖 8년 乙亥(1575)에 출생, 仁祖 25년 丁亥(1647)에 卒하였는데, 天性이 謹嚴 重厚하였으며 學問과 武藝를 닦아 武科及第하여 벼슬이 宣傳官에 이르렀다. 仁祖 2년 甲子(1624)에 李适의 亂이 일어나자 ‘오늘 내가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다. 내가 죽거든 내가 타고 다니던 말가죽에 내 시체를 싸서 故鄕에 보내라 하고 公州의 行在所로 달려가 盟誓하고 都元帥 張晩의 陣에 나아가 李适을 섬멸하였다.
仁祖大王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亂離를 당하여 한 번 죽는 일이 어렵고, 去就를 분명히 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 손가락을 끊어서 血書를 쓰는 衷情은 涅背의 衷心이다’ 라고 하여 岳王精忠錄을 特賜하고 錄勳卷을 下賜하였다. 英祖 己丑年(1769)에 兵曹參議의 贈職이 내렸다.
11)禦侮公 趙善道
先生은 宣祖 13년 庚辰(1580)에 出生하였는데 宣祖 27년 甲午(1594) 15세에 母夫人이 빚어 준 술 한 두루미를 들고 明軍을 맞아 接對하였다. 光海 戊午年(1618)에 武科 及第하여 部將이 되었고, 仁祖 2년(1624) 李适의 亂에 節度使의 幕僚로서 鞍峴(무악재) 戰鬪에서 크게 공을 세웠다. 御侮將軍으로 振武原從 1等에 錄勳되었다.
12)郡守 趙亨道
先生은 明宗 22년 丁卯(1567)-仁祖 15년(1637) 字大而 景達 號 東溪 自稱 淸溪道士 生六臣 趙旅 先生의 五世孫 으로 靑松 安德에서 출생하였다. 同知中樞府事 址의 子 인데 伯父 堣의 後嗣가 되었다. 宣祖 16년(1583)에 僉知 閔樞에게 受學하고 21세에 咸安으로 歸省하다가 1587년 寒岡 鄭逑 선생을 師師하였으며 鄕試에 연이어 壯元하였다.
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선생은 27歲로서 義兵을 일으켜 忘憂堂 郭將軍을 따라 火旺山城에서 힘을 다하여 싸웠다. 宣祖 27년(1594) 朝廷에서는 武科試를 베풀어 인재를 뽑았는데 28歲인 선생은 ‘男兒가 이 어려운 세상에 나서 國難의 收拾이 時急한데 어찌 臣下된 자의 道理로 文科만 바라리오’ 하면서 곧 붓을 던지고 武科에 應試하여 宣傳官 및 備局郞을 拜受하였다. 이 때 西厓先生은 首相으로서 國王에게 보고할 一切 文書作成을 선생에게 一任했는데 應呼書筆이 빨라서 나는 것 같으나, 한 字도 그릇됨이 없으므로 府中에서 모두 칭송하고, 조정에서 賞으로 通政階를 除授하였다.
그 후 河陽 慶山 固城縣令(1606년) 등의 縣監 縣令을 지내고 1622년 嘉善階에 올라 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副摠管 副元帥 寶城郡守 등에 拜命되었다.
仁祖 2년(1624) 李适의 난에 扈駕하여 敵黨을 擊滅하였고, 丙子胡亂에 70歲로 憤怒를 참지 못하여 出戰하려 하였으나 和解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鬱憤이 觸發하여 등창이 나서 얼마 후에 卒하였다. 以下約. 靑松 安德에 東溪亭 이 있고 德峯祠에 祭享하였으며 東溪集 3책이 있다. [韓國人物大辭典 ㅇ-ㅎ 216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3)宣傳官 趙繼善
선생은 仁祖 5년 丁卯(1627)胡亂 때에 淸兵이 줄지어 밀어닥치자 先鋒에 나가서 적을 무수히 무찌르고 戰死하였다. 肅宗 32년 丙戌(1706)에 父子 旌閭를 命하면서 ‘父子雙節’이라 하여 無盡亭 왼쪽 百步 地點에 旌閭를 세웠다.
3. 맺는 말
이와 같이 漁溪先生의 뒤를 이어 六代에 걸쳐 한 집안에서 十三忠이 났다는 것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人類 歷史上 그 類例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忠이란 자기 자신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것이라 하였다.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다는 것은 임금만을 위한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이것은 인간의 本性인 天性 곧 仁과 義에 의한 것이다. 仁은 사랑이고 義는 옳음이다. 仁과 義를 實踐한 것은 人間에 대한 큰사랑으로 가장 올바르고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 참된 삶은 當代에 끝난 것이 아니고, 人類 歷史가 持續되는 한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 東洋의 儒學 思想은 착한 인간의 本性대로 사는 것을 가장 올바른 삶, 참된 삶, 가치 있는 삶, 행복한 삶이라고 여겨, 이것을 배우고 익혀서 평생동안 실천하는 것을 學問이라고 하였으며, 이것이 곧 인간의 道理이고 聖賢이 되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政治와 敎育의 根本을 여기에 두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孝子 忠臣 烈女 등의 빛나는 삶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 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신이 複雜하고 混亂한 현대생활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