竹軒 崔恒慶 先生의 生涯와 思想
金 時 晃 <慶北大>
1. 머리말
凝窩 李源祚 선생은 [竹軒先生文集] 序文에서 '退溪 先生 이후로 德業이 가장 旺盛하기로는 우리 文穆公 寒岡 鄭逑 先生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고을이 마침내 君子들에게 魯나라 같은 存在가 되었다. 그 중에서 竹軒 崔恒慶 公이 가장 드러났으니, 가장 가까이 살면서 가장 먼저 寒岡 先生의 門下에 올랐으며, 가장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竹軒 선생은 寒岡 선생을 따라, 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篤信 力行하여 純正한 學問과 寬厚한 德行이 가장 높았으므로 隱君子라는 평을 받았다. 그런 데도 亂離에 火災를 만나 遺稿가 많이 燒失되었기 때문에 겨우 4권 2책의 문집이 전할뿐이다.
2. 家系와 生涯
1) 家系
先生의 字는 德久이고, 號는 竹軒이며, 永川人이다. 新羅 初期 六部의 大人 佐之는 沙梁部의 崔畇一이었다. 後世에 永川에 籍을 두게 되어, 高麗 燃山府院君 諱 漢이 始祖가 되었는데, 燃山은 곧 지금의 永川이다.
그 後에 諱 元道는 恭讓王 때 高麗의 國運이 다했음을 알고 隱居하여 벼슬하지 않았는데, 號를 泉谷이라 하였다. 朝鮮 太祖가 나라를 세우고 세 번이나 禮儀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李遁村 父子가 辛旽의 禍를 免할 수 있도록 처리했던 것은 실제로 다른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세상사람들은 孫北海가 수레 揮帳으로 趙邠卿을 가리워 감추어 준 일과 비유하였다.
이 분이 諱 壹을 낳았는데, 知郡事를 지내고, 左尹 諱 洽의 後嗣가 되어 星州로 移居하였다. 左尹이 諱 興孝를 낳았는데, 文科에 及第하여 直提學을 지냈으며, 文學으로 이름이 났고, 그 筆法은 海東名筆書帖에 많이 보인다.
高靈縣監 諱 希浩에 이르러 漢陽으로 이사를 하였고, 寒暄堂 金宏弼 先生과는 同壻가 되어 友愛롭게 지냈으며, 先生에게는 高祖父가 된다. 曾祖父 諱 裕는 參奉을 지냈고, 祖父 諱 師哲은 遺逸로 薦擧되어 司憲府 掌令에 除授 되었다. 父 諱 淨은 成均館 進士이며, 母는 宗室 延昌君 鶴壽의 女이다.
선생의 家系를 一覽表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始祖 崔漢 : 封 燃山君 (今永川)
2世 玩
3世 尙義
4世 承澍
5世 允琪
6세 佋
7世 英
8世 洽 : 左尹
9世 壹 <生父 元道 號 泉谷> 知郡事 星州 移居
10世 興孝 : 文科 直提學 名筆
11世 繼孫
12世 滋
13세 希浩 : 高靈縣監 漢陽 移居
14世 裕 : 參奉
15世 師哲 : 遺逸薦 司憲府 掌令
16世 淨 : 成均 進士
17世 恒慶 : 竹軒 (明宗 15년 1560 - 仁祖 16년 1638)
18세 은 : 鸛峯 (宣祖 16년 1583 - 1656) - 竹軒 玄孫 后大 寒居 - 竹軒 六代孫 益重 負暄齋 - 竹軒 九代孫 永祿 海庵
轔 : 梅窩 (宣祖 30년 1597 - 1644)
2) 先生의 生涯
先生은 恭憲王 15年 庚申(1560) 3월 24일 高陽의 元塘里 本家에서 出生하였는데, 어려서부터 容貌가 밝고 빼어났으며, 器局과 度量이 넓고 遠大하였다. 5, 6歲에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으며, 큰 글씨를 잘 썼다. 進士公이 보고 기특하게 여겨서 ‘세상에서 간혹 나를 글씨 잘 쓴다고 하지만, 이 아이의 筆力은 거의 나보다 낫다.’ 고 하였다.
9세에 모친을 따라 延昌君의 집에 갔었는데, 그 집의 服飾과 수레와 말들이 盛大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곧 마음이 유쾌하지 않아 모친에게 돌아가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선비 집안의 子弟가 오랫동안 머물 곳이 못 됩니다.”고 하였다. 延昌君이 듣고 크게 칭찬을 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참으로 이 아이에게 부끄럽구나. 이 아이는 훗날 반드시 君子人이 되어, 崔氏 집안을 繁昌하게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乙亥年(1575)에 父親 進士公이 先祖 墓를 살피기 위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그 해 9월에 星州의 田舍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先生은 겨우 16歲였었는데, 천리 밖에서 訃音을 듣고 울부짖으며 哀痛해 하여 거의 숨이 끊어질 지경이었지만, 곧 바로 모친을 모시고 바쁘게 내려갔다.
寒岡 鄭逑 선생이 姻戚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불쌍하다고 여겨서 찾아와 곡을 하고 매우 지극히 돌보아 주었다. 공이 비록 弱冠의 나이에 있었지만, 葬禮를 치르고 祭祀를 지내는 것이 格式과 禮儀를 어기지 않았다. 喪禮를 치르는 모든 節次는 하나하나 반드시 寒岡 先生에게 아뢰어 質正을 받은 뒤에 시행하였다.
喪을 마치고 漢陽으로 돌아가려고 하니까 寒岡 先生께서 先塋이 계신 곳이라고 하면서 머물게 하였으므로, 그 가르침을 따라 執贄의 禮를 행하고 學業을 請하였다. 寒岡 先生 門下에 出入하면서 君子가 立身하고 行己하는 要諦를 직접 친히 배우고 들었다. 스승의 말씀을 篤實하게 믿어 攄得하지 못하면 그만 두지 않았으므로, 寒岡 先生께서 매우 중히 여겼다.
모친께서는 성품이 엄격하여, 慈愛로움 때문에 그 가르침을 느슨하게 하지 않았으며, 遊學의 經費를 넉넉하게 해서 학업에 懶怠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진 어머니가 嚴한 아버지 같다고 하였다.
先生은 성품이 매우 孝誠스러워 모친을 모실 때, 기운을 낮추고 溫和한 얼굴로 일찍이 말을 거칠게 하거나 얼굴빛을 사납게 하지 않았으며, 한결같이 모친의 뜻을 받들어 모시는 것에 마음과 정성을 다하였다. 아침저녁으로는 잠시라도 곁을 떠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행동하였으므로, 모친이 매우 즐거워하고 편안히 여겼다.
아래로 종들을 다스릴 때, 비록 허물이 있더라도 가벼운 매질이나 꾸짖음도 하지 않고 “너희들도 사람의 자식이다.”고 하였으므로, 어린 종들이 모두 두려워 하여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모친을 모시는 餘暇에는 곧 바르게 앉아 책상을 대하여 經籍을 探究하였는데, 의심나는 곳이나 어려운 곳이 있으면 스승에게 질문하여,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된 뒤에 돌아왔으므로, 그 篤實한 뜻과 학문을 향한 精誠은 同門 여러 사람들이 모두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萬曆 壬辰年(1592)에 倭寇가 갑자기 일어났는데, 선생이 거처하는 곳이 매우 窮僻한 곳이라 처음에는 알지 못하였다. 啞軒 宋遠器 公은 바로 선생의 同門友였으므로, 달려와서 賊의 상황이 매우 급박하다고 알렸다. 선생은 곧 모친을 모시고 집안식구들과 함께 몇 리 밖에 있는 오래된 산성으로 올라가, 옛날 거처하던 곳을 내려다보니, 倭賊의 형세가 사방에 가득하고, 연기가 하늘까지 뻗쳐 있었다. 宋公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창칼의 화를 거의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死生間의 莫逆한 친구라 할 만하다 하였다.
伽倻山으로 들어가서 집을 짓고 모친을 모시고 살았는데, 그때는 전쟁으로 混亂하였기 때문에 饑饉으로 죽은 殭尸가 매일 길가에 이어졌다. 그러나 선생은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쌀을 짊어지고, 맛있는 飮食의 供養과 모친을 편안하게 하는 물건들을 일찍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孝子의 行實이다.”라고 稱頌하였다.
당시에 鶴峯 金文忠公이 招諭使의 命을 받아 여러 고을에 檄文을 보냈는데, 그 말이 激烈하여 선생이 그 문장을 읽고는, 반도 읽지 않아서 눈물이 턱까지 흘러내렸다. 모친이 이상히 여겨 묻기를 “무슨 글을 보았기에 이와 같이 感慨해 하느냐”고 하니, 선생이 똑바로 앉아서 檄文의 內容을 말씀드렸다. 모친께서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시기를 “나라의 危急함이 저와 같고, 金公의 檄文이 또 이와 같으니, 이것은 臣下된 사람으로서 숨어 있을 때가 아니다. 너의 마음은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선생이 일어나서 대답하기를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衷情과 憤怒가 생겨서 이 몸을 犧牲하여 적에게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어머니께서 늙으셨는데 다른 형제들이 없고 이 한 몸뿐이니, 어찌 차마 버리고 떠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모친께서 “네가 오늘 處한 곳이 이와 같구나.”라고 하였다.
그래서 선생이 북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뿌리고 感慨해서 두 편의 律詩를 지어서 感懷를 敍述하였다. 그 詩에
荐食長蛇是島夷 사납고 탐욕스런 섬나라 오랑캐들
靑邱一域入瘡痍 청구의 천지가 만신창이 되었네
乘輿去闕三軍泣 남여 타고 떠날 때 삼군의 울음소리
宗社蒙塵萬姓悲 종사가 몽진하니 백성들이 슬퍼하네
飮血勤王諸將相 울분을 토하면서 근왕하는 장상들
捐軀報主幾男兒 임금 위해 몸 바칠자 그누구 이런가
吾生虛負菁莪化 내생애 인재 교양 그 뜻을 저버리니
北望龍灣但涕洟 북녘 의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노라
南州義旅㧾儒冠 남주의 의병들은 모두가 유생인데
時正吾人出處難 나의 출처 정말로 어려운 때이라네
沙塞雲迷仙仗遠 요새에 구름 끼어 임금은 먼데
萱闈日迫暮暉殘 훤실에는 날 저물어 어두워 지려하네
艱危國家愁千緖 나라의 어려움에 천만가지 시름이오
忠孝君親道一般 충효와 군친의 도 모두가 같은 것
荒谷誰傳招諭檄 황곡에 초유 격문은 누구가 전했는가
腰間空泣劒光寒 허리에 찬칼 차고 헛되이 울고 있네
라고 읊었다. 이 때 鶴峯 金文忠公의 招諭檄文이 발표되었기 때문에 기타 吟詠한 것들이 대부분 이와 같이 임금과 나라를 걱정하고 오랑캐의 침략에 대해 울분을 토로한 것이었다.
辛丑年(1601) 42歲에 母親喪을 당하였다. 죽을 먹고 물을 마시며, 슬퍼함이 法度를 넘었으며, 哭泣하고 居喪하는데 한결같이 모두 禮制를 따랐으므로, 葬禮와 祭祀를 지낼 때 遠近에서 와 본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고 感服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服을 마치고, 乙巳年(1605) 46歲에 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문을 닫고 學問을 探求하였으며, 科擧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모친께서 병이 없을 때 한 번 應試하기를 願하였기 때문에 이 때에 잠시 힘써서 應試한 것이지, 본래 뜻은 아니었다.
그래서 鰲巖에 몇 칸의 집을 짓고, 창밖에 푸른 대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들어, 그 정절을 사랑하여 아침저녁으로 玩賞하며 읊조리었다. 따라서 竹軒이라 扁額하고, 조용히 지내면서 心性 修養과 학문에 열중하며 自得하는 趣味를 가졌다. 그리고 勢利와 紛華한 것들에 있어서는 淡白하게 여겼다.
선생은 나이와 덕망이 함께 뛰어나서 名望이 점점 높아졌으므로, 항상 士林에서 크게 議論할 것이 있거나, 크게 是非를 가릴 일이 있으면 반드시 선생의 判斷을 기다려서 정하였다. 鄭寒岡 先生도 ‘마땅히 水下의 어른과 서로 의논하라’고 하였는데, 鰲巖이 檜淵의 下流에 있었기 때문에 水下라 하였다.
鄭寒岡 先生이 川谷書院 짓는 일을 主管하였는데, 일찍 일을 마치고는 강당에 선비를 모아 講學을 맡기려는 뜻을 선생에게 전하였다. 선생의 두 아들이 모두 학문과 덕행이 있었는데, 鄭寒岡 선생께서 禮書를 校訂하시면서 곧 편지를 보내 함께 오라고 하셨으니, 스승에게 중히 여김을 받은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선생은 늘 古今의 禮說이 매우 많고 또한 煩雜하여 講學하거나 일에 臨하여 시행할 때에 자세히 살피기에 어렵다고 여겼다. 그래서 여러 大家들의 禮에 관한 글을 모아, 내용별로 분류하여 책 한 권을 만들어, 참고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또 鄭寒岡 先生의 祭儀를 모아 손수 그림을 그려서, 자손들이 따라 시행할 규범으로 삼고는 “모든 사람의 집안 祭享의 禮節은, 豊盛하게 하고자 하면 煩雜한데 이르기 쉽고, 儉素하게 하려고 힘쓰면 薄한데 이르기 쉽다. 반드시 一定한 法式이 있어야 豊盛하지도 않고 儉素하지 않아서, 煩雜하고 어지러우며 薄小하거나 疏略한 失手가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庚戌年(1610) 51歲에 鄭寒岡 先生이 같은 고을의 朴而立이란 사람에게 誣告를 당하여 禍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는데, 門下의 諸賢들이 上疏를 하여 억울함을 밝히려고, 先生을 疏頭로 推戴하였다. 그래서 서울로 가는데 湖西 땅에 이르러 마침 등창이 나서 올라갈 수 없었다. 그러나 朴而立이 賢人을 誣告한 實狀과 寒岡 선생께서 誣告를 당한 寃痛함이 온 세상에 환하게 들어 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선생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庚申年(1620) 61歲에 鄭寒岡 선생께서 泗水 가에서 돌아가셨으므로, 공이 두 아들을 데리고 몸소 殯所를 마련하고 斂襲하기를 父母喪을 당한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喪服은 입지 않고 心喪 三年을 지냈다. 寒岡 선생께서 평소에 선생과 함께 주고받은 편지를 하나 하나 모두 책상 위에 모아두고, 때때로 읽어보면서 思慕하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壬戌年에(1622) 遠近의 많은 선비들이 寒岡 先生을 모시는 書院을 檜淵에 세우기로 의논하고, 모두 선생을 院長으로 추대하였다. 선생은 藤庵 裴尙龍公과 함께 精誠을 다하여 計劃을 세우고 推進해서 6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지금의 祠堂과 講堂, 및 庖廚는 모두 선생이 計劃한 것이다.
寒岡先生의 位牌를 奉安하는 날, 모인 선비들이 5,6백 명은 되었다. 雜多한 禮를 모두 行한 후에 先生이 首席에 앉아서 술잔을 잡고, 모든 사람들과 酬酌하였는데, 行動擧止가 편안하고 조용하여 조금도 疲困한 기색이 없었다. 그래서 모인 사람들이 모두 오늘 盛大한 儀式을 보는 것만 해도 크나큰 다행인데, 院長의 한량없는 德望은 또한 평소에 보지 못했던 것이라고 하였다. 檜淵書院의 일을 마치고, 다시 同門의 諸賢들과 의논하여 神道碑를 세워 선생의 墓道를 표시하고, 文集을 整理하여 선생의 道를 드러내려 하였으니, 始終一貫 스승을 위해 부지런히 힘쓴 정성을 볼 수 있었다.
丙子年(1636) 겨울에 오랑캐가 猖獗하여 임금이 南漢山城으로 들어가니, 나라의 위급함이 壬辰倭亂 때와 다름이 없었다. 선생이 이미 77세가 넘었으나, 變亂을 듣고 슬퍼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전에 壬辰倭亂을 당해서는 모친이 계tu서 자유롭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또 늙어서 할 만한 것이 없구나. 臣下된 職分으로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하였다. 그날로 두 아들에게 高靈의 義兵鎭營으로 가게 하였다.
南漢山城에서 降伏의 恥辱을 당했다는 消息을 듣고는 鬱憤을 참지 못하고 詩를 지어 뜻을 나타내었다. 그 詩에
秋深霜鬢悲書劍 깊은 가을 늙은이는 책칼 들고 슬퍼하며
氣惡腥塵憤虜酋 악독한 오랑캐의 날뜀에 분노하네
若使吾齡當少壯 내가 만약 나이 젊은 장년이었다면
可從帷握運兵籌 유악으로 나가서 군사들을 지휘하리
<聞南漢被圍>
又曰
神廟鴻恩字小偏 신종황제 넓은 은혜 작은 나라 치우쳐
龍蛇再造我朝鮮 임진란에 우리 조선 다시 중건 시켰네
伊川被髮嗟今日 이천에서 머리풀고 오늘을 탄식하니
江漢祖宗異昔年 강한의 조종들은 옛날과 다르다네
學士魂消豺虎窟 학사 혼은 시호의 소굴에서 사라지고
書生淚入犬羊天 서생들은 견양들의 세상에서 눈물지네
帝秦深恥終難洗 진나라를 황제라던 수치를 씻지 못해
蹈海高風孰魯連 바다 속에 은거한 노중련은 누구인가
<感慨有吟 丙子>
그 時代를 슬퍼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앞뒤로 대개 한결같았다.
仁祖 16年 戊寅(1638) 5월 19일 柞川精舍에서 考終하시니, 享年 79세였다. 처음에 星州 동쪽 伊鳳山에 葬事지냈다가, 8年後 乙酉년에 星州 동쪽 伐知坊 新士瀨의 辛坐의 언덕에 移葬하였다.
配位는 豊山 柳氏로 參奉 景濬의 女이다. 처음 寒岡선생이 先生의 어진 配匹을 얻기 위해 西厓 柳成龍 선생과 서로 의논하여 婚處를 정하였는데, 바로 西厓 先生의 再從妹였다. 夫人은 禮儀 있는 집안에서 成長하여 맑은 덕과 아름다운 행실이 있었다. 祖上을 받들고 시어머니를 모심에 婦人의 道理를 다하였다. 先生보다 32년 먼저 丁未년 11월 2일에 세상을 마쳤다. 그해 12월 고을 남쪽 省法山 坊梨峴 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後에 曾孫인 瑋가 貴해져서 通訓大夫 濟用監正에 贈職되었고, 配位는 淑人에 贈職되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90년 후 英祖 6年 庚戌(1730)에 온 고을의 선비들이 선생의 德行을 끝내 泯滅시킬 수 없다고 하여, 선생 평소에 講學하던 곳에 祠堂을 세우고 祭祀지냈다. 그곳을 ‘雲巖’이라고 하였으며, 지명을 따른 것이다.
선생의 玄孫 進士 崔后大 公은 墓碣銘에서 先生의 人品과 生涯를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선생은 따뜻하고 어질며 깊고 의젓한 자질과 참되고 厚德하며 誠實하고 確固한 행실을 가지고 있으면서, 집안에 들어가면 母親의 家庭敎育이 있었고, 나가면 君子가 이끌어주는 方向이 있었다. 그래서 他鄕의 南方에 외롭게 살면서 慨然히 스스로 世俗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이 맛보지 못한 것을 맛보고, 뿌리를 돋우고 가지를 자라게 하여 正道에서 벗어나지 않고 오직 實踐하는 것을 일삼아서 講說하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그러니 선생이 하늘에서 얻은 天性이 참으로 이미 厚德하며, 學問에 있어서는 힘쓸 곳을 안다고 할 만하다. 山林에서 一生을 마치자 세상에서는 끝내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한 번의 臨命도 얻지 못했으니, 이것이 뜻 있는 선비나 隱士들이 慨歎하는 것이다.
3 先生의 文集 및 詩文
선생의 詩文은 현재 4卷 2冊의 文集에 傳하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선생 遺事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선생의 著述 중의 극히 一部分만이 남아 있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아름다운 말과 떳떳한 行實을 글로 써서 세상에 전할 만한 것이 여기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丙子胡亂에 原稿와 書籍을 海印寺에 保管했다가 마침 火災를 만나 모두 재 속에 들어가 버렸다. 不肖한 後孫 后大가 먼 後代에 태어나서 비록 한 두 가지를 記述하고자 하지만 상고할 길이 없으니 어찌 하겠는가’
文集의 編纂은 序文에
‘歲丁卯 本孫某甫 裒成謄本 詩文附錄 纔二糾규 請余讎校’
(정묘년에 본손 아무개가 등본 시문과 부록 두 책을 모아서 나에게 교정을 부탁하였다)
라 한 것으로 보아 高宗 4년(1867) 경에 4권 2책으로 編纂된 듯하다. 이 문집을 토대로 하여 詩와 文을 대략 살펴보고자 한다. 各 卷別 詩文의 種類와 편수는 아래와 같다.
제1권 詩 : 五言絶句 竹軒 등 195首 <律詩 古詩 七言絶句 포함>
제2권 詩 : 七言律詩 幽居謾詠 5수 등 65首 詩 總計 260首
挽 : 寒岡先生挽 등 27편
제3권 書 : 答李白川 등 4편
說 : 名二子說 등 2편
祭文 : 祭寒岡先生文 二首 등 7편
箴 : 自警箴 1편
附錄 : 挽詞 24편 祭文 6편
제4권 記聞錄 遺事 등 13편
비록 그러하나 일찍이 들으니, 선생은 젊어서 大賢人의 門下에 올라 직접 가르침을 받았으며, 물러나서는 당시의 名賢인 旅軒 張顯光 先生․石潭 李公․외재 이공․아헌 송공․동호 이공․락재 서공․투암 채공․모당 손공․후천 황공․양졸 재정공․백천 이공․완정 이공․등암 배공과 서로 道義交를 맺고 끝없이 往來하며 학문을 講論하였다. 한 때 師友의 盛大함은 儒林과 學士들이 지금도 서로 전하고 있다. 또한 등암公과 채공의 문장과 사간 李道長의 공을 통곡하는 시와 書院을 建立할 때 士林에서 올린 文章, 奉安할 때 祭文은 모두 참고하여 그 遺風과 餘韻을 드러낼 만하다. 이에 감히 그 대강을 기록하여 墓碣銘을 청하는 단초로 삼는다. 立言 君子가 취해서 선택하기를 바란다. 不肖 玄孫 進士 后大는 삼가 기록한다.
贈李茂伯張仲順 이무백. 장중순에게 주다
元禮眞模楷 원례는 참으로 귀감이었고
季鷹自席珎 계응은 스스로 선비다웠네
相逢忻握手 만나면 반가워 손을 맞잡고
兩別各傷神 헤어지면 못내 가슴 아파했어라
硏玉惟看墨 옥을 갈땐 내내 먹줄만 봐야 하거니
迷塵不見人 세속에 물들면 친구도 안 보이는 법
秋天旅雁遠 가을 하늘 기러기는 멀리 날아가고
歸帆向東津 돌아가는 돛배는 동나루로 떠나누나
竹軒集序
退陶後 德業最盛 無如我文穆公 吾鄕遂爲君子之魯 而竹軒先生崔公 爲最著 以其居最近 登門最蚤 薰炙最久也 惜乎 有德必有言 而始熸于島燹 再盪于家燬 斷爛巾篋 尙未之梓 歲丁卯 本孫某甫 裒成謄本 詩文附錄 纔二糾請余讎校 余盥翫而敬復曰 嗟乎先生之道 得之泗上 容貌氣像 不問可知之 文定弟子也 言議見解 相與問難之 西山父子也 當亂而負子路之米 媾和而守仲連之義 送子赴陣爲師 刱院七十年 勤勤懇懇 洵不出於生三事一之義 本立而道生 學修而行備 更何庸文爲哉 况文與道一 道在文中 片羽一臠 又曷可小之哉 余非知道者 而於先生之文 不敢以文而視之 只書所感于平昔者 爲竹軒先生文集序
[凝窩先生文集 卷之十三 序]
퇴계 선생 이후로 덕업(德業)이 가장 왕성하기로는 우리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선생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고을이 마침내 군자들에게 노(魯)나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 중에서 죽헌(竹軒) 최항경(崔恒慶)공이 가장 드러났으니, 가장 가까이 살면서 가장 먼저 한강선생의 문하에 올랐으며 가장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애석하도다! 덕이 있는 사람이 반드시 말을 남겼을 것이나, 처음에는 왜란에 불타버리고 다시 집안의 화재로 불타버려서, 해어져서 온전하지 못하게 책상자 속에 남아 있는 것도 아직 간행하지 못하였다.
정묘(丁卯)년에 본손 아무개가 시문(詩文)과 부록(附錄)의 등본(謄本) 두 책을 모아서 나에게 교정을 부탁하였다. 내가 손을 씻고 살펴보고 공경히 말하기를 “아아! 선생의 도는 한강선생에게서 얻었다. 용모와 기상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 문정(文定; 胡安國)의 제자 같았고, 의론과 견해는 서로 어려운 것을 물어 보았으니 채원정(蔡元定)․채연(蔡淵)․채침(蔡沈) 부자와 같았다. 난리를 당했을 때는 자로(子路)가 그 사람의 밥을 먹고 그 사람이 환란을 당했을 때 피하지 않겠다고 한 의리를 가지고, 강화가 이루어지자 나라가 망하면 동해에 빠져 죽겠다고 한 노중련(魯仲連)의 의리를 지켜서, 아들들을 의병진영에 보냈다. 서원을 세워서 70년 동안 부지런하고 절실하게 하여, 참으로 군사부(君師父) 일체(一體)의 의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근본을 서서 도가 생기고, 학문을 닦아서 행실이 갖추어 졌으니 다시 어찌 문장같은 것을 하겠는가! 무릇 문장과 도덕은 하나이니, 도가 문장 속에 있다. 그러나 깃털 하나, 한 저름의 고기라고 어찌 적게 여기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선생의 문장에 있어서 감히 문장으로 보지 못하고 평소에 감회를 적어서 죽헌선생문집의 서문(序文)으로 삼는다.
鸛峯集序
一室而喬梓相傳 塤箎迭唱 如西山之節齋 九峯文定之致堂 五峯間世而 僅一二有焉 惟我竹軒先生崔公 以岡門高弟 有二子幷稱 水下三賢 其伯曰鸛峯 先生生有異質 於父母言 未或有違 壬辰島訌 竄山谷時 公年纔十歲 奉六十老祖母 一飯不敢先 未嘗呼飢於親側 及長隨先公受學於師門甚見推詡與季氏梅窩公友愛尤篤同床共被終身如一癸酉聯中司馬人皆以金昆玉季稱之丙子南城之變受先公命赴高靈義陣旋以講和而罷歸吟詩以見志自是日陪先公於鰲巖亭遺外世慮專務講學家庭唱喏兄弟征邁服習父師之訓到老彌勤嗚呼若先生之一室三賢眞無愧於西山之蔡崇安之胡而惜乎時丁不幸卷懷林泉兵焚之熸幷與其所著述而無傳焉收拾於咳唾之餘者只詩集一卷而已然以詩論詩亦可以觀性情之正非風花題品役心聲病者比也又曷可少之哉諸崔氏將付剞劂要余丁乙余以鄕里後生不敢以老洫辭畧書蕪語于卷首 [凝窩先生文集 卷之十三 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