進菴 李遂浩 先生의 生涯와 學問
金時晃 <慶北大>
1 머리말
進菴 李遂浩 선생은 朝鮮 英祖 때 嶺南 金泉에서 出生하여, 평생동안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자신의 學問과 後進 敎育에 專念한 典型的인 儒學者였다. 어려서는 鏡湖 李宜朝 선생에게 배우고, 후에 性潭 宋煥箕 先生에게 受學하여, 小學 및 經書, 諸子書 등을 두루 涉獵했고 文章에고 능하였다.
尤庵과 遂菴의 학문 淵源 및 文獻의 傳受와 湖黨․洛黨 士友의 넓은 도움을 얻어, 經傳의 精微함과 禮學의 蘊奧함을 깊이 攄得하였으며, [小學集註增解] [庸學知錄] [啓蒙一得] [春秋意見] [四禮類會] [四禮類會圖] [進菴詩集] [進菴文集] 等 적지 않은 著書와 詩文을 남겼다. [小學集註增解]와 [四禮類會]는 다행스럽게도 木板으로 出刊 되어 널리 전하고 있지만, 나머지 著述은 모두 筆寫本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더구나 이와 같은 훌륭한 學問的인 著述이 현대에 와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學界에서 전연 硏究報告조차 되지 않은 狀態이므로, 우리 東洋禮學會에서 先生의 生涯와 學問 世界의 一部分이나마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筆寫本으로 남아 있는 資料는 분량이 많고, 또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毁損된 곳이 더러 있어서, 複製하여 보기가 힘들므로, 解讀하는데도 쉽지 않을 듯하다.
그래서 깊이 있게 살펴보지 못하고, 다만 槪括的인 소개로 끝날 수밖에 없는 점이 부끄럽고 아쉬운 것이다. 後日을 期約하며 此後 젊은 학자들의 알찬 硏究에 기대를 걸뿐이다.
2 生涯와 學問
1) 先生의 生涯
先生의 諱는 遂浩이고, 字는 子和 또는 養吾이며 延安人이다. 始祖의 諱는 茂인데 唐나라 中郞將으로 蘇定方을 따라 우리 나라에 와서 百濟를 征伐하고, 新羅에 머물면서 벼슬하여 延安伯에 封爵되었으므로 子孫들이 마침내 籍을 갖게 되었다.
대대로 벼슬하여 朝鮮朝에 이르러 諱가 末丁이고, 官職이 少尹이며, 延城府院君으로 追封된 이가 있었다. 府院君의 아들 휘 淑琦는 敵愾功臣, 佐理功臣에 策勳되었고, 관직이 戶曹判書에 이르러 延安君으로 봉해지고 諡號는 靖襄公이다. 靖襄公의 아들은 諱가 世則이며 進士였는데, 寒暄堂 金宏弼 先生과 秋江 南孝溫 先生등 諸賢의 師友錄에 실려 있다. 六傳하여 諱 圾으로 文學이 高尙하고 밝아 여러 차례 鄕試에 합격하였다. 스스로 玄亭이라 불렀으며, 師友들의 追從을 받았는데 이 사람이 선생의 高祖이다.
曾祖의 諱는 基采이고, 祖父의 諱는 熙績이이며, 父의 諱는 再春인데,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어 行實이 純粹 篤實하였으므로 사람들이 ‘厚德한 長者’라 칭찬하였다. 어머니는 居昌 愼氏 守儉의 딸이며, 樂水 先生 諱 權의 五代孫이다. 성품이 아름답고 貞淑하며 慈愛로우며, 女子의 도리에 엄격하고 端正하였다. 일찍 寡婦가 되어 집안이 寂寞하였으나, 스스로 일하고 농사를 지어 조상의 祭祀를 받들고, 奴僕을 거느리는데, 모두 그 도리를 다하면서 가업을 지켜 두 아들에게 전해주었다.
선생은 英祖 甲子(1744)년 正月 8일에 金泉市 龜城面 上院里 本第에서 出生하였는데, 타고난 性品이 아름다우면서도 質朴하였고, 外貌는 훤출하였으며, 재주가 聰明하고 敏捷한데다가 氣質이 남달라 사람들이 모두 奇異하게 여겨 유달리 사랑하였다. 겨우 네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어, 집에는 공부를 돌보아 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오직 兄과 외로이 서로 의지하면서, 慈愛로운 어머니에게 養育과 가르침을 받았다.
아홉 살에 母夫人이 선생을 데리고 明星堂 鏡湖 李宜朝 先生에게 나아가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였는데, 그 마음이 매우 懇曲하여 明星堂이 그 정성에 感動하어 받아들여 가르치게 되었는데, 敎授에 힘이 들지 않았으며, 또 감독을 기다리지 않고 곧 文理를 통할 수 있게 되었다. 책 읽는 것 역시 부지런히 하여 文藝가 점점 성취되어 글을 짓고 이해함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成長하면서 두루 여러 책들을 읽고 時文도 익혀 文名이 더욱 성하였다. 비록 科場에서는 여러 차례 실패했으나, 그의 글을 빨리 얻어 가지려는 사람이 많았다. 또 한가히 글의 格律과 운과 격조가 溫和하고 淡泊하면서 端雅하고 씩씩하여, 쓸데없이 아름답게 꾸며 화려한 모습은 없었다.
집에 거처할 때에도 행실이 바르고 또 매우 純正하였다.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었으며, 奉養의 책임이 비록 그 형에게 있었으나,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며 일에 따라 힘을 다하면서 미음을 끓여드리는 것을 돕고, 몸을 편하게 하는 물건과 뜻을 받드는 方道에는 그 극진함을 다하였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드렸으며, 슬픔이 지나쳐 禮節의 도를 넘었고, 장사를 지내고는 형과 함께 무덤 곁에서 廬幕을 지어 三年喪을 마쳤다.
선생은 본래 가슴과 배에 冷痛이 있어서 無時로 發作하였으며, 몸이 수척하고 기운이 약해 고기가 없으면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나, 居喪하는 葬事 전에는 죽을 먹었고, 3년 동안 담박한 素食을 하였지만 宿患이 다시 發病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初喪과 葬禮와 祭祀에는 한결같이 禮制를 따랐으며, 服을 마치고 省墓할 때도 반드시 哀哭을 하고 展拜를 하였다. 祖上에게 祭祀에 齋戒하는 예절에 있어서는 곧 고기를 먹지 않고 또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술은 齋戒를 하는데 지극히 방해가 되므로 더욱 신중히 해야하는데, 세상에서 모두 고기는 먹지 않으나 술은 마신다’ 고 알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형에게 友愛하고 공경함이 지극하여 낮이면 平床을 같이 쓰고, 밤이면 이불을 함께 덮으며, 음식을 나누어 먹고, 옷을 함께 입었다. 처음에 재산을 나누고, 후에 함께 살 것을 의논하였는데, 엄하게 規模를 세우고, 자세히 節目을 정하여 그 재산을 합하여 함께 살면서 ‘百忍’으로 그 집의 이름을 삼았다.
마침 몇 년 동안 흉년이 들자, 母夫人이, 살아나가는데 곤란함이 있고, 家業이 점차 衰落해짐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두 아들에게 경계하며 재산을 나우어주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으나, 서로 좋아하며 공경하고 우애하기를 더욱 돈독히 하였으며, 힘써서 따라 어버이의 뜻을 거스리지 않으려고 하였다.
宗黨間에게는 和睦함을 극진히 하여, 친척의 가깝고 먼 것을 묻지 않고 한결같이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하였다. 學業을 行함에 힘써서 하고, 過失을 規制하였으며, 고을과 마을에서는 착한 이들과 사귀기를 즐겼다. 종들이나 백성들에게는 사랑으로써 어루만지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모두들에게 歡心을 얻었다.
일찍이 大德山 아래 弇州村에서 잠시 살았는데, 몇 년 동안 산골의 백성들이 비록 매우 어리석고 모질었으나, 선생이 禮俗으로 交遊하고, 은혜와 신의로써 대우하니까,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고 받들며, 즐거이 感服하여 돌아간 후에도 오랫동안 잊지 않았다.
선생이 別世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마을의 안팎 늙은이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고, 슬피 울면서 말하기를 ‘만일 죽음을 대신하고 運命에 贖罪할 방도가 있다면 내 어찌 微喘한 목숨을 아끼겠는가’라고 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반드시 아침 일찍 家廟에 배알하고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後進들을 가르치며 이끌어주고 장려하였다. 科擧工夫 역시 부지런히 하고 課業과 독려를 더해 실효가 있음을 보았다.
선생은 타고난 天稟이 이미 남과 달라, 自己擴充과 修養에 道가 있었고, 言論은 溫厚하면서도 和平하고, 風采는 편안하면서도 沈着하였다.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함에 모남을 드러내지 않았고, 의리로 끊어야 하는 곳에서는 늠연히 犯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귀로는 邪惡하고 淫亂한 소리를 듣지 않았고, 눈으로는 바르지 않는 色을 접하지 않았다. 財貨와 이해관계, 화려한 곳에 이르러서는 淡淡하게 좋아하지 않았고, 사양하고 받고, 취하고 돌려줌에 한결같이 義의 옳고 그름을 살폈다. 착한 일과 좋은 말을 즐겨하였으며, 조용히 몰래 스스로 수양하여 名聲을 추구하기를 원치 않았고, 기쁘게 聖世의 逸民이 되어 일생을 마쳤다.
선생은 뛰어난 재주와 아름다운 자질로,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공부하여 크게 이룬 것이 있으나, 諸生들은 窮僻한 고을에 있어서, 끝내 밝은 스승과 두려워할 만한 친구를 서로 함께 따를 사람이 없었다.
正祖 丁巳(1797)년 십일월 그믐에 별세하니 54세였다. 지곡촌 오른쪽 북동쪽 언덕 先塋 아래에 장사를 하였다. 配는 밀양 卞氏 萬杰의 딸로 月潭 휘 昌後의 玄孫이다. 온유하고 아름다운 덕성이 있어 군자의 配匹로 마땅하다. 일남일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本一이고, 딸은 昌寧 成楚烈에게 出嫁하였다.
2) 先生의 學問
선생은 마침내 文章을 짓는 것은 餘事이고, 科擧에 及第하는 일은 하늘에 달린 것이므로, 힘써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속으로 향하는 공부에 專念하여 우선 大學 中庸 論語 孟子를 두루두루 熟讀하였으며, 宋나라 諸儒들의 책을 깊이 읽어, 오묘한 이치들을 토론하고 푹 잠겨 體得하여, 얻지 못해도 내버려두지 않고 自得하는 데에 이르렀다.
先生 行狀에 ‘辛丑年에 明誠堂 鏡湖 李宜朝 선생이 선생을 데리고 性潭 宋煥箕 선생에게 가서 부탁하면서, 더욱 尤庵․遂菴의 학문의 淵源 文獻의 傳受와 湖黨․洛黨 士友의 넓은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하였는데, 性潭이 한 번 보고는 곧 ‘큰선비’라 許與하고, 늘 경전의 뜻이 精微함과 禮學의 蘊奧함을 가지고, 서로 책상을 마주하여 講劘하면서, 英才를 얻은 것을 즐거워하였다. 선생 역시 歸依할 곳이 있음을 매우 기뻐하여, 해마다 늘 한 두 차례 가서 傳受받고 익히기를 그치지 않았고, 평생토록 그 일을 마치기를 기대했다.’ 라고 되어 있다.
(1) 小學集註證解
小學書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양식이므로, 世敎에서 崇尙하던 것인데, 集註의 折衷이 이미 밝으나, 여러 學者의 講說이 갈래가 많아, 학자들이 두루 살펴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많은 것을 걱정하였으므로, 선생이 널리 포괄하고 두루 모아,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려서, 조목에 따라 편입시켜 그 의문 나는 곳을 해석하고, 잘못된 곳을 바로잡아 性潭에게 叱正하니, 性潭이 매우 가상하게 여겨 마침내 그것을 [小學集註增解]라고 하였다.
그리고 筆寫本으로 전하는 [小學疑義]가 있는데, 小學의 內容中 疑問点과 다른 經書와 不一致하다든가 不合理한 것들을 提示하였다.
[小學集註增解]는 1997년 4월 30일 學民文化社 洪載坤 發行 乾坤 2책 洋裝으로 影印刊行되었는데 表紙에는 [小學集註增解]라고 하였지만 內容에는 [小學諸家集註增解]라 하였으며, 모두 6卷인데 각 面마다 왼쪽 또는 윗 쪽에 축소한 諺解를 첨부하였다.
그리고 一冊에는 처음에 小學集註增解總目이 있고, 다음에 序文이 세 편 있는데, 崇禎後 三庚申孟夏 恩津 宋煥箕의 小學集註增解序 <進菴家藏>, 歲在甲戌 春正月哉生魄 御製小學序 <宣政殿訓義>, 歲在甲子 春正月下旬 謹序 御製小學後序 이다.
다음에 是歲 仲春上浣題의 御製小學後識, 宣政殿小學訓義凡例, 小學集註總論增解, 小學集註總目增解, 小學篇目, 小學集註考訂을 收錄하여 小學書 硏究에 필요한 모든 資料를 提示하였다.
(2) 禮學
선생은 더욱 禮學을 힘써 공부하여 常禮와 變禮, 節文, 度數를 經傳에 근본을 두고, 諸家의 說을 잘 이해하고 貫通함으로써 옛 성인들이 制作한 근본 취지를 깊이 깨달았다. 그래서 禮學을 論할 때는 곧 感歎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마침내 [四禮類會]를 편찬하였는데, 그 吉凶 儀禮의 글과 嘏辭, 祝文, 疎, 狀의 條例들을 모으고 분류하여 쉽게 살필 수 있게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四禮類會圖式]과 [禮記疑處問答] [家禮增解疑義問答]이 筆寫本으로 전하며, [家禮釋疑]를 編纂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다.
[四禮類會]에는 崇禎紀元後 三庚戌 三月旣望 明誠堂主人書의 序文이 있고, 四卷 四冊의 내용은 다른 禮書와 달리, 冠婚喪祭의 節次에 따른 類別로 대략 아래와 같은 順序로 構成 되어 있다.
卷一 : 笏記 冠 笄 昏 喪 初終 治葬 虞祭 卒哭 小祥
卷二 : 大祥 禫 吉祭 改葬 祭 祠堂 四時祭 忌祭 墓祭 具 冠 昏 喪 祭
陳設 冠 婚 喪 祭 序立 冠 昏 喪 祭
卷三 : 制 冠 婚 喪 祭
卷四 : 祝文 告辭 書式
[四禮類會圖式]은 붓으로 圖를 만들고, 中間中間에 必要한 制度와 解說을 덧붙였으며, 總 29張 58面인데 目次나 面數를 나타내지 않았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深衣前後圖 大帶之圖 冠梁作알之圖 幅巾緇冠黑履之圖 笄禮之圖 醮女迎壻之圖 壻婦同牢之圖 同牢設饌之圖 婦見舅姑之圖 婦饋舅姑之圖 初終男女哭擗之圖 握手瞑目緇冒玄冒之圖 七星板棺束帛銘旌等圖 小斂大殮之圖 立銘旌設靈床奠喪次之圖 各種喪服圖 首絰腰絰之圖 本宗五服之圖 三父八母之圖 本宗三殤降服之圖 外黨妻黨服之圖 出嫁女爲本宗降服 妾服 妻爲夫黨服 爲人後者爲本宗降服 斬衰齊衰三年之圖 齊衰杖期不杖期 各種服圖 心喪三年 問喪 弔奠 金井機 誌石 甖筲苞黻翣 雲翣 大轝 神主前後 櫝 碑 明器 方相 魌頭 遷柩 遣奠 發靷 下棺 祀后土 反哭受弔 虞卒哭 祔祭 禫祭 改葬 祠堂 正寢 廳事 正寢時祭 등에 대한 모든 圖가 거의 完備되어 있다.
[禮記疑處問答]에는 曲禮下 檀弓上下 王制 月令 曾子問 禮運 禮器 郊特牲內則 玉藻 喪服小記 大傳 少儀 樂記 雜記上下 喪大記 祭法 表記 冠義 鄕飮酒義 등 21篇에에 대해 疑問處를 말하고, 간단한 자신의 見解를 밝혔다.
[家禮增解疑義問答]에는 參禮 深衣 野服 再加 昏禮 親迎 婦顯舅姑 壻見婦之父母 初終 成服 朝夕奠 問喪 附葬 朝祖 反哭 虞祭 卒哭 祔祭 小祥 大祥 禫祭 改葬 時祭 先祖祭 忌祭 墓祭 등에 관하여 질의 응답한 것이 있다.
(3) 經學 性理學
선생은 또 周易에 造詣가 있어 [啓蒙一得]을 편찬하였는데, 圖書, 卦畫, 蓍策, 變占의 奧妙함에는 論旨가 상세하고 발휘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春秋를 읽어 [春秋意見]을 著述하니, 그 事蹟의 득실과 文字의 의문과 어려운 곳을 자세히 조사하고 갖추어 논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數學, 干支, 吉凶에 널리 통하여 籌法乘除 지극히 精妙한데까지 이르렀으며, 朞三百, 璣衡, 律呂등에 이르러서는 가슴속에 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선생은 공부함이 깊고 識見이 높아서 사람들이 모두 ‘後學에게 嘉惠로와 斯文에 공이 있음이 크다’ 라고 하였다. 또 당시에 여러 선비들의 學術이 分裂하여 각각 문호를 세우고 있었는데, [大學]의 ‘明明德’을 논함에 있어서는 모두 다 분수가 없다고 하였고, [中庸]의 ‘天命之性’과 ‘人物所稟’을 논하면 어떤 이는 五常이 모두 같다 하고, 혹은 사물은 혹 단지 仁이 있고, 혹 단지 義만 있어서 사람과 같지 않다고 생각하여 논란이 시끄럽고 어지러워 歸一点이 없었다.
그런데 進菴先生의 스승인 明誠堂이 ‘明德을 創立함에 分數가 있다’ 는 논의를 세워 ‘明德은 本心으로 말하면 性情을 거느리고 理氣를 겸하는 것인데, 그 理는 분수가 없고, 그 氣는 분수가 있으니, 明明德이라고 하는 것은 分數가 있는 氣質을 변화시켜 다시 分數가 없는 性理를 다 회복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 선생은 이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마음속에 가만히 부합되었다고 말하고, 또 실마리를 찾아내어 발휘하고 미루어 밝힌 것이 많았다. 人物의 本性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論하였다.
‘人物性之論 則以爲 人物同具五氣五理 以此而言則皆同也 但人則 五氣俱全故 五常亦各俱全 但物則木氣偏故 仁不若人之全 金氣偏故 義不若人之全 禮智信皆然 以此而言 則不同也云者 正與朱子所謂 性最難說 要說同亦得 要說異亦得之說 合矣’
人物의 本性을 論하는데 있어서 선생은 사람과 事物이 모두 五氣, 五理를 가진다고 생각하였으며, 이것으로 말하자면 모두 같다는 것이다. 다만 사람에게 있어서는 五氣를 완전히 다 갖추어 있으므로, 五常 또한 각각 완전히 갖추어 있다. 다만 사물은 木氣가 치우쳐 있으므로, 仁이 사람의 온전함만 못하고, 金氣가 치우쳐 있으므로, 義가 사람의 온전함만 못하니, 禮와 智와 信도 모두 그러하니, 이것으로 말하자면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朱子가 말한 ‘性은 가장 말하기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이야기이다. 만일 같다고 하면 또한 터득한 것이고, 다르다고 말하여도 역시 얻음이 있는 말이 된다.’ 는 말과 合致된다. 이것은 天理를 밝힌 것이다.
대개 선생의 識見은 밝고 투철하고 心地가 公平하였으므로, 義理를 論하는 것에 있어서 혹 다소 어지러운 착란이 있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바르게 窮究하여 밑바닥의 어지럽게 뒤섞인 곳까지 깊이 잘 살펴서 그 同異를 변론하고, 가지런히 整理되어 있지 않는 다른 단서들을 살펴보고는 혹 자기가 잘못하였고 다른 사람이 옳다는 것을 깨달으면 또한 자기를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르는 것에 조금도 지체하거나 인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은 일찍이 明誠堂에게 말하기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참으로 가장 어렵다. 만일 잘못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곧 후회하는 마음이 생겨서, 없애도 떠나지 않고 도리어 마음에 병이 되니, 바로 程子가 말한 ‘자신에게 죄가 있어 자신을 꾸짖음이 없을 수 없으나, 마음속에 머무르게 하여 후회가 되도록 해서는 않 된다’ 고 한 것은 참으로 증세에 따라 맞게 쓰는 좋은 약이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明誠堂은 ‘그대 또한 이와 같은 병이 있는가. 이것은 내가 힘을 써 다스리려 했으나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선생은 언젠가 더운 여름에 술에 조금 취하여 책상에 기대어 잠이 들었는데, 李和 仲 東泰가 보고 忠告하니까, 곧 뉘우치고 自警銘을 지었는데 그 銘은 아래와 같다.
‘禹是聖 寸陰惜 余則惰 學不篤 寢于晝 錦翁責 勉實工 戒朽木 善哉言 眞藥石 乃庸箴 書諸壁’
‘禹임금은 聖君인데 寸陰을 아꼈도다. 나는 게을러서 하여 학문을 독실히 하지 않고 낮잠을 잤으니, 錦翁이 착실하게 공부하기를 꾸짖고 독려하며, 썩은 나무의 경계로 깨우쳤으니 선하도다. 그 말이 참으로 경계되는 유익한 말이므로 써서 벽에 붙이노라’
일찍이 [中庸]을 읽다가 부지런할 謹에 이르면 두려워하며 스스로 말을 경계하여 14조의 言戒를 지었는데, 그 言戒는 다음과 같다.
‘勿論朝政得失 勿論守令賢否 勿論先輩優劣 勿論他人長短 勿呼尊長名字 勿言人家過失 勿言途道傳聞 勿言不經文字 勿言市井俚言 勿言世俗浮談 勿言巫佛邪說 勿言人己利害 勿爲朋儕戱言 勿爲忿言疾言’
‘朝廷의 得失을 말하지 말라. 守令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논하지 말라. 선배의 優劣을 논하지 말라.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논하지 말라. 어른의 이름과 字를 부르지 말라. 남의 집안의 잘못을 말하지 말라. 길에서 전해들은 것을 말하지 말라. 허황된 문자를 쓰지 말라. 시장가의 속어를 쓰지 말라. 세속의 유언비어를 말하지 말라. 巫俗과 佛家의 邪惡한 말을 하지 말라. 남과 자기의 이해관계를 말하지 말라. 친구들과 농담하지 말라. 화나는 말과 빨리 말하는 것을 하지 말라.’ 또 ‘守口如甁’ 네 글자를 적어 옷과 띠에 符節처럼 지니면서 경계하고 반성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이 외에 [庸學知錄] [啓蒙一得] [春秋意見] 등의 著述들이 있는데, 특히 [庸學知錄]이라는 題目으로 한데 묶어 놓은 筆寫本은 大學과 中庸의 各章에 대한 자신의 意見을 약술한 듯하고, [鳳山講席問答太極圖] [湖齋問答] [聖學輯要問答] [栗谷先生語錄疑義問答] [禮記疑處問答] [近思錄疑義問答] [家禮增解疑義問答] 등이 한데 섞여 첨부되어 있으나, 다 살펴서 言及하지 못하고 다음 기회로 미룬다.
3 先生의 著述 詩文
선생이 著述한 詩와 文章 [進菴詩集]과 [進菴集]이라고 筆寫한 두 책에 傳하는데, 그 분량 또한 적지 않다. 詩集에는 目次와 序文이 없이, 처음에 丙戌年에 지은 <讀書聖蹟菴>이란 題下의 詩 11首를 시작으로 총 58張 96면에 실려 있으니. 줄잡아 대략 500餘首는 될 것 같다.
讀書聖蹟菴 丙戌
世事紛紛了不關 어지러운 세상일 관여하지 아니하니
一輪霜月照心寒 바퀴같은 차가운 달 마음속에 비친다네
村炯渡水靑凝竹 등불은 강을 건너 푸른 대에 비취고
野雪隨風白滿山 쌓인 눈 바람 따라 온 산에 가득하네
氷下鳴泉聲欲滿 얼음 속 흐르는 물소리가 아름답고
松端宿鶴夢猶閒 솔가지에 자는 학은 한가로이 꿈꾸네
客來更結雲林約 오는 손과 운림의 약속을 다시하며
詩酒風流屬此間 시와 술의 풍류를 이곳에서 누리세나
이 詩는 丙戌年 23歲, 아직 靑年 時節이라, 聖蹟菴에서 한창 공부에 熱中하던 때에 지은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일에는 關與할 때가 아니므로, 고요한 산골 달 밝은 차가운 밤에 조용히 글을 읽으면서, 자연 속에 沒入되어 아름다운 빛깔과 소리에 陶醉한 마음이다.
밝은 달과 시골 밤의 깜박이는 희미한 등불, 푸른 대나무와 만산에 쌓인 흰 눈, 그리고 얼음 속을 흘러가는 맑은 물소리와 바람소리에다 솔가지에 잠들어 꿈을 꾸리라 생각되는 학의 모습, 어느 것 하나 나의 마음을 無我의 境地로 이끌어 가지 않는 것이 없다.
선비들의 風流를 즐길 때가 아직 이른 나이지만, 意氣投合하는 정다운 손이 찾아 든다면 어찌 글만 일고 있을 수 있겠는가. 雲林 속의 시와 술은 必須的인 것이 아니랴. 이러한 자연과 어우르는 환경 속에서, 저절로 맑고 착하고 아름다운 本性이 되살아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공부이며, 진실한 學問의 境地에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文集] 또한 目次와 序文이 없이, <山神祭文> 을 시작으로 보통문집 세권 정도는 될 것 같은데, 序 記 說 銘 贊 上樑文 書 告由文 祈雨文 家狀 路程記 書譜 應旨疏 등 종류가 매우 多樣하나, 알아보기 어렵다. 문장 類別로 整理編輯하여 出版할 價値가 없지 않지만 쉽지 않은 作業이라 後日 博識者에게 期待해 볼 수밖에 없다.
4 맺는 말
스승인 鏡湖 先生은 손수 撰한 行狀 末尾에 아래와 같이 記錄하였다.
‘아아 슬프다. 君은 어려서부터 나에게 와서 공부하여 재목이 이루어질 때까지 함께 했는데, 내가 늘 이 학문을 전수함에 이 사람이 있는 것이 기뻤고, 君 또한 나를 아버지처럼 대하며 곁에서 奉養을 하면서 일정한 법도가 없는 마음을 삼는데 까지 이르렀다. 또 이 마음을 옮겨 性潭을 섬겼다. 臨終할 때에 실오리 같은 미미한 기운으로 겨우 입을 열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정성을 다하여 두 선생을 모시려하였는데, 불행히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선생의 문하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홀로 가르치신 은혜 저버렸으니 이것이 남은 한입니다.’ 또 말하기를 ‘최근에 [家禮釋疑]를 펴는데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라 하니 어찌 마음이 불타는 듯하고, 곡이 더욱 아프지 않겠는가.
아아 슬프다. 군의 학문과 덕행은 마땅히 行狀이 있어 후손에게 전해져야 하는데, 세상에서 ‘군을 상세히 아는 사람이 나만한 이가 없다고 하여, 마침내 나에게 짓기를 부탁하나, 내가 어찌 차마 군의 행장을 짓겠는가. 그러나 내가 이미 나중에 죽으면서 군의 행장을 짓지 않는다면, 나 또한 늙은 사람이라 혹 바람 앞의 등불 같아 갑자기 죽는 것을 면치 못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대가 後代에 사라져 없어지게 하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야 되겠는가. 이에 죽음을 참으며 기운을 내어, 붓을 잡고 글을 쓰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