川沙 金宗德 先生의 生涯와 敎育
慶北大 金 時 晃
1 머리말
川沙 金宗德 先生은 朝鮮 後期 文運이 가장 旺盛하던 英祖 正祖 시대에, 學問과 敎育에만 專念하여, 많은 學問的 業績과 後進 敎育에 크게 貢獻한 學者이다. 선생은 大山 李象靖 선생의 門人으로 獨學力行하여 大山 先生의 學問을 嫡通으로 繼承하여 發展시켰다.
선생의 著述은 文集 19卷 10冊을 비롯하여, [草廬問答] [考證] [聖學正路] [聖學入門] [心經講錄刊補] [立本] [孔門一統] [釋學正贓] [政本] 등 尨大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와 같이 尨大한 선생이 남긴 글들을 啓明漢文學硏究會에서 모두 모아 解題를 하여 資料叢書로 合本 刊行함으로써, 공부하는 이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0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 貴重한 資料들은 전혀 硏究되지 않고 있으니, 이 분야를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매우 부끄럽고 또한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런 뜻에서 이번 東方漢文學會에서 선생에 대한 多角的인 연구를 하게 된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筆者는 先生의 高尙한 學德에 대해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지만, 부끄럽게도 선생의 글은 미쳐 읽어보지 못했었다. 그러던 차 이번 선생에 대한 硏究에 參與하게 되어 대단히 榮光스럽게 생각하며, 先生의 年譜와 行狀 및 기타 일부 資料를 土臺로 하여, 선생의 學者的 生涯와 선비 思想의 일면이나마 대강 살펴보고자 한다.
2 先生의 生涯
1) 家系와 生涯
선생의 字는 道彦이며 安東人으로, 始祖는 高麗 中興功臣 上洛君 諱方慶이다. 朝鮮朝에 들어와 北評使 諱克諧는 淸白吏로 이름 났고, 松隱處士 諱光粹는 學行으로 세상에 重望이 있었으며, 晩翠堂 諱士元은 陶山門人인데 선생의 六代祖이다.
五代祖는 禮賓直長 諱濬이고 贈司僕正 諱尙璘은 高祖이며 曾祖는 諱賢佐, 祖諱는 履模, 考諱는 南應인데 모두 德을 감추고 벼슬하지 않았다. 妣는 順天金氏 處士 冑嶷의 女이다.
선생은 英祖 元年 甲辰(1724) 에 義城縣 點谷面 沙村里 第에서 태어났는데, 先生 先祖 忠烈公이 安東府西 檜谷里에 살았고, 十三代祖 評議公이 義城으로 移居함으로써 世居하게 되었다. 선생의 家系는 아래와 같다.
始祖 金方慶 上洛君 忠烈公
2世 愃
3世 承澤
4世 昴
5世 九鼎 官都評議
6世 子瞻 監牧官
7世 孝溫 官司直
8世 克諧 官北評使 淸白吏
9世 光粹 號 松隱 學行
10世 溏 官箕子殿 參奉
11世 世佑 官引儀
12世 士元 號 晩翠堂 退陶門人
13세 濬 官直長
14世 尙璘 號 養眞堂 贈司僕寺正
15世 賢佐 官通德郞
16世 履模 官通德郞
17世 南應 有禮書 二卷
18世 宗德 號 川沙 逸薦義禁府都事 大山先生門人 有文集
弟 宗敬 號 苟齋 文科 持平 首登大山門 文集五卷
弟 宗發 號 容淵 文科 掌令 大山門人 文集四卷 禮書二卷 儒家要覽三卷
弟 宗燮 號 濟菴 生員 大山門人 文集四卷
19世 慶進 號 聲灘 通德郞 深於性理之學
姪 原進 通德郞
姪 川進 通德郞
姪 彦光 出
姪 山進 通德郞
姪 三進
姪 經進 號 白室 通德郞 文集三卷
20世 養觀 號 錦洲 承習家學 師事外曾祖百弗庵門 有遺稿
이상 家系를 살펴 보았고, 다음 선생의 受學 過程부터 學者 및 敎育者로서의 一生을 年譜를 중심으로 간단히 정리해 본다.
英祖 6년 己酉(1729) 6세 선생이 어버이 곁에 뫼시고 있을 때 늘 까마귀가 울면 곧 얼굴색이 변했는데, 俗言에 까마귀가 우는 것은 惡氣를 끌어온다 하므로, 혹 부모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가봐 念慮한 까닭이다. 이와 같이 어려서부터 독실한 孝心이 있었다.
7歲 英祖 7년 庚戌(1730)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이미 부지런히 배울 줄을 알아 어른의 鞭督을 기다리지 않았다.
15歲 英祖 15년 戊午(1738) 王考 通德郞公으로부터 讀書法에 대한 訓戒를 받았다. 선생은 이에 힘입어 뒤에 크게 成就하였다.
‘王考通德郞 戒先生曰 凡讀書 必取一二件 千萬遍熟腹 使精神氣力 含蓄於中 做他根本 然後 泛濫諸書 方有成親造一冊 使書范蔡傳 及蘇文授之 先生自承是訓 惕慮加意 少無懈意 後來成就 多賴此’
16歲 英祖 16년 己未(1739) 聘夫人 韓山李氏
17歲 英祖 17년 庚申(1740) 再從叔父 處士公이 退溪集을 他人에게서 빌려 왔는데, 선생이 빌려 밤낮으로 읽고 풀이하느라 寢食을 잊었다.
28歲 英祖 28년 辛未(1751) 十月 入後山先齋 設講 心近性理諸書 講之 送仲弟 苟齋公 宗敬 授業 于大山先生. 科擧 공부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함.
‘時 大山先生 倡道東南 爲當世儒宗 先生謂苟齋公曰 吾亦有心久矣 但屈首科擧 猖狂顚倒 出自這裏 從遊君子之門 羞赧不敢 爾以受敎於師門者 早歸敎我 勵志行開 知見稍似潔淨 然後追躡云云’
29歲 英祖 29년 壬申(1752) 8월 中鄕解兩試
30歲 英祖 30년 癸酉(1753) 春 中生員會試
31歲 英祖 31년 甲戌(1754) 5월 讀 性理大全 12월 讀 大學
32歲 英祖 32년 乙亥(1755) 32세 1월 遭 祖母夫人李氏喪 5월 讀 朱子書
7월 遣 苟齋公 往侯 大山先生. 時 大山先生 爲延烏守 先生 因成 感秋詩 一絶
天地秋聲又到枕 每年悠泛倩誰箴 無端慨想臨風倍 况是延烏一域心 又云
天地萬物同一理 腔子內外更無他 雖然大本主在我 試看惻隱心如何
33歲 英祖 33년 丙子(1756) 是年大饑 加之癘疫 僵屍遍野 且門內有無數喪慽 先生 坐不安食不甘 慘忍惻怛 溢於色辭
4월 讀 退溪先生集 9월 病中 詠菊詩成 詩曰
荒籬江曲夕陽濱 歲暮襟期覺一般 照日孤英金唐突 戰霜病骨鐵精神
恨無言語論心事 喜有馨香透肺肝 送酒白衣還敗意 淵明亦是勢交人
34歲 英祖 34년 丁丑(1757) 3월 讀 鄭桐溪 先生行狀 至數處不覺 涕下沾牀
10월 會鄕人 議定輿地勝覽
36歲 英祖 36년 己卯(1759) 3月與諸弟 講近思錄 6月 中別科鄕試
37歲 英祖 37년 庚辰(1760) 2月 讀大學或問 3月 河洛質疑成 8月 啓蒙卦畫質疑成 11月 登孤雲寺 講心經 12月 大學或問 孟子啓蒙稟目成
39歲 英祖 39년 壬午(1762) 39세 丁處士公憂 2월 葬處士公 處士公 家狀成
42歲 英祖 42년 乙酉(1765) 仁說質疑成
43歲 英祖 43년 병술(1766) 善惡皆天理說成 性善說成 12월 兒子慶進冠禮 戒賓于 剛窩任公而行禮 書御僮僕誡 貞庵記成 取守之固 而無所動之義
44歲 英祖 44년 丁亥(1767) 讀朱子書 涵養說成 操舍存亡說成
45歲 英祖 45년 戊子(1768) 正月 道伯以道學薦于朝 與諸生考講小學’
46歲 英祖 46년 己丑(1769) 讀近思錄 3월 陪門父老 參慶老讌于杜溪
47歲 英祖 47년 庚寅(1770) 47세 縣侯 設講 請先生爲講長 讀太極西銘 又讀朱節
48歲 英祖 48년 辛卯(1771) 讀 敬窩洛川謾錄小識成 4月 心經質疑成
49歲 英祖 49년 壬辰(1772) 看校退書節要 稟質于大山先生 陶山板頭標識成 10月 讀皇極經世書 草朱節辨說 縣侯致歲儀 以酒肉 紙筆墨 遺之
50歲 考證成
51歲 英祖 51년 甲午(1774) 草成 禮說同異 諸條 看語類 整其句讀 12월 中東堂鄕試 苟齋公 及第出身 設喜筵
52歲 英祖 52년 乙未(1775) 論釋大學正心疑義
53歲 英祖 53년 丙申(1776) 與諸生 講論語
54歲 正祖 元年 丁酉(1777) 六月 會門族于晩翠堂 修整族譜
55歲 正祖 2년 戊戌(1778) 2월 讀儀禮 間以孟子 5월 讀家禮 又讀溪上質疑 儀禮問解 六月 禮文疑問成 縣侯徐琢修來訪 與諸生 講心經 讀五先生禮說 12月 哭淑夫人李氏
56歲 正祖 3년 己亥(1779) 2월 始書禮書 至三月而畢
4월 成近思錄稟目 往質于 大山先生 7월 讀朱節
9월 讀朱子跋魏元履墓表識成 11월 讀退陶書行錄
57歲 正祖 4년 庚子(1780) 正月 再答李后山書 論難退陶行狀 4月 讀中庸
4월 上大山先生書 論出處行止 5월 孔門一統成 8月 讀朱子大全 及書儀
12월 大山先生 易簀
58歲 正祖 5년 辛丑(1781) 5월 梅榴說成 7월 讀性理大全 12월 讀中庸
59歲 正祖 6년 壬寅(1782) 正月 勘校 莊陵所藏 鶴峯金先生 疏草
3월 會大山書堂 校整文集 6월 說酌于晩翠堂 7월 釋學正贓成
11월 聖學正路成
61歲 正祖 8년 甲辰(1784) 61세 正月 與諸生 講論孟 3월 讀六禮疑輯 製通虎溪文 以大山先生 叫閽建祠事 列邑投通于虎溪 先生代鄕人製送
6월 政本成 9月 讀西厓先生文集
62歲 正祖 9년 乙巳(1785) 2月 讀近思錄 3월 杏壇童子寃稿後識成
9月 讀禮記 11월 讀心經 日校 講錄刊補
63歲 正祖 10년 丙午(1786) 正月 讀綱目 3월 讀西銘 又看皇極經世書 及啓蒙 5월 8일 參哭班 時東宮 薨逝 9월 相視論道淵 在角里 香山下 頗有水石 先生有搆舍 藏修之意往視之 10월 校朱書類編 12월 論惡亦不可不謂之性
64歲 正祖 11년 丁未(1787) 64세 正月 讀退陶集 5월 孺子亭成 6월 草校苟齋公遺稿
65歲 正祖 12년 戊申(1788) 3월 草政要問答 讀退書節要 4월 張達山遺事後識成 5월 讀近思錄 11월 丁母夫人金氏憂 時先生 已躋衰麻 在身之年 而哭泣之節 一遵儀制 未嘗小弛三年 亦未嘗少釋衰絰 12월 葬母夫人
66歲 正祖 13년 己酉(1789) 正月 以學行薦 除義禁府都事 先生在憂中 故辭敎旨 戒門子弟及婢僕 無敢以職名稱謂 3월 讀金溪禮說 6월 晩窺銘作 略修仁說疑問
67歲 正祖 14년 庚戌(1790) 4월 讀喪禮備要 5월 讀晦齋先生集 6월 條辨居業錄 9월 聖學入門成 10월 讀語類
68歲 正祖 15년 辛亥(1791) 6월 朴南野 甲乙錄 中語條辨成 讀南軒集 復讀朱節
69歲 正祖 16년 壬子(1792) 7월 校濟庵公遺稿
71歲 正祖 18년 甲寅(1794) 正月 讀漢書 2월 授僉知中樞府使
11월 哭子慶進 公自號 聲灘 容貌文學 以遠大期之 不幸早世 先生 與鄭南屛書曰 數年以來 父子約爲朋友 許涉嘲謔 勿相忌避 云云
72歲 正祖 19년 乙卯(1795) 3월 改竪 松隱先祖 墓碣 讀周易 往茅山書堂 校勘心經刊補 6월 讀近思錄 7월 讀魯史
73歲 正祖 20년 丙辰(1796) 正月 看論語或問精義 5월 李野淳 寄示紫霞詩帖 李野淳 來示淵派圖 6월 讀九思堂集 7월 草廬問答成 9월 讀朱子大全 校屛谷集
74歲 正祖 21년(1797) 正月 作善人詩
君子不得見 군자는 쉽게 만날 수 없지만
善人不可無 선인은 없을 수 없는 것이라
一鄕有四五 한 고을에 너댓 사람 있어도
鄕風可以扶 고을 풍속 부지할 수 있으며
一門有一二 한 문중에 한 두사람 있으면
門族知所趨 족인들이 추향할 곳을 안다네
倘今空蕩蕩 만약 지금 법도가 무너졌다면
豈非識者虞 어찌 식자의 근심이 아니리오
이 詩는 善行을 勸獎하고 사람의 道理를 걱정하는 精誠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賢人 君子가 되기를 바라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善人은 많이 있다. 글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바르고 착해서 선인의 행동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는 것이다.
선생은 庶民들 속에서 이러한 사람이 많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다. 한 고을이나 마을에 이러한 善人이 몇 사람만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趨向할 곳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선인을 渴望하는 지극한 精誠이라 하겠다.
4월 鄕飮酒禮圖成
6월 讀屛銘發揮 先生以大山先生命 商確是書 一生不離案上
7월 29일 始示疾 8월 18일 考終于寢 是夜 陰雨霏霏 嚴霜繼下 景色慘惻 哲人之亡 有如是矣 訃聞 遠近士林 莫不悼歎 李俛菴 金龜窩 護喪堅執 士林之議 容淵公 牢拒遂止 只以門內子姪 充執事
11월 葬于安東府東 吉安面後峴 午坐之原 立齋 鄭宗魯 撰碣銘
純祖 6년 丙寅(1806) 文集 20卷 10冊成 門人從姪 堂進 幹事
純祖 14년 甲戌(1814) 行狀成 門人 李秉運撰
高宗 43년 丙午(1906) 草廬問答 6卷 3冊 印役成 拓庵 金道和 撰跋
己酉(1909) 聖學正路 全帙一冊 自靑松 鳧江書堂 重刊
乙卯(1915) 士林議不祧 校理 李晩煃 撰告由文
丙子(1936) 聖學入門 全帙一冊 刊役成 年譜及附錄文字 同時刊出
이상 年譜에 나타난 선생의 一生 履歷을 대강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대스승인 大山先生을 崇慕한 부분 및 自警自誡, 그리고 子弟 및 弟子 敎育에 대한 것은 別項으로 나누어 言及하였다.
선생은 科擧 試驗에 네 번 合格하였는데, 29세 때 鄕解兩試 합격, 30세 때 生員會試 合格, 36세 때 別科鄕試 合格, 51세 때 東堂鄕試 合格 등이었다. 그러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學行으로 세 번 薦을 받았는데, 45세 때 道學으로 道伯의 薦, 66세 때 學行으로 薦을 받아 義禁府都事를 除授, 마지막 71세에 僉知中樞府使에 除授되었다. 그러나 亦是 한 번도 벼슬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이것을 보면 처음 젊었을 때에는 科擧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는 않았다가, 36세 이후에 大山先生에게 나아가 本格的으로 學問을 하기 시작한 뒤부터는 벼슬에 대한 생각을 끝까지 하지 않았던 것이다.
2) 尊師 受學 및 向道 慕師之誠
선생은 학문과 선비의 故障인 嶺南 名門家에서 出生하였으므로, 자연히 陶山學을 景仰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陶山의 學脈을 嫡傳한 大山先生을 스승으로 섬기는 幸運을 가졌다. 그래서 大山先生에 대한 思慕와 景仰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찾아보기 힘든 점이 여러 곳에 보이며, 선생의 年譜를 보는 사람 누구에게나 이것이 큰 感銘을 불러일으키게 할 것이라 생각된다. 關係 記錄을 정리하여 아래에 보인다.
20歲 英祖 20년 癸亥(1743) 登葛蘿臺 望淸凉山 有景仰 陶山之懷 後有 記陶山錄
34歲 4월 陪大山先生 玩鈷鉧洞. 縣東玉山 有鈷鉧洞 水石頗奇 大山先生 行至其處 而請見 故往赴之 蓋先生與弟苟齋公 有搆亭同棲之意
35歲 英祖 35년 戊寅(1758) 7月 陪大山先生 遊黙溪院
39歲 承大山先生書 以修身飭行 無添先德之意 申申獎勉 先生感泣銘佩
40歲 英祖 40년 癸未(1763) 敬齋箴集說問目 往稟于大山先生 7月 承大山先生書 論中庸第九章 知仁勇疑義
41歲 英祖 41년 甲申(1764) 上大山先生書 論中庸不睹不聞疑義 陪宿大山先生 于晩修齋 稟屛銘發揮
50歲 英祖 50년 癸巳(1773) 11月 送從弟宗駿 從姪當進 兒子慶進 受學于 大山先生
57세 7월 伻問湖上 時大山先生患瘧
58세 正月 進湖上侯行止 時大山先生 除禮議 4월 書侯李小山 進拜湖上 時大山先生 以刑議赴召 到忠州 呈疏辭歸 先生往論疏事
閏五月 進謁湖上 大山先生 赴召至榮川 瘧作因駕還
8월 進侯湖上 時大山先生 九條疏批下
12월 大山先生 易簀 會中 以先生及李后山 爲相禮 成服日 門人議所服 先生曰 旣不成弔服 則加麻無義 以白布巾帶從事
59세 正月 送容淵公 進湖上探山事 時葬地有支節 故往探 3월 往赴大山先生襄禮 12월 進至湖上 致奠參常祀
60세 正月 校大山先生遺事(李艮巖所錄) 3월 讀葛庵先生文集 校痛慕錄(艮巖所述) 及師門敍述(后山所著) 4월 校大山先生文集 送大山先生遺事 質問于小山李公 11월 會孤雲寺 校大山先生文集 夢謁大山先生 十八日夜 謁大山先生 稟曰 近日全無講論 凡喜不輕動 怒不輕發 等節 不能親切形容 大山先生曰 不輕動發足矣 何待形容
12월 往湖上 哭罷先師終喪 還宿于角洞
61세 6월 校大山先生年譜 李后山編 受湖上致胙之禮
63세 2월 夢謁大山先生 初以大學正心章 質問 又以中庸問曰 學者皆以中庸末章 爲收斂到性處 然只是形容不顯 淵微之妙如天 非是回向 未發之體 大山先生曰然 盖先生 向道慕師之誠 懇篤不已 故累發於夜夢
64세 9월 李后山 奉大山先生文集 來會后山精舍 李艮巖 鄭立齋 李俛菴 東校 凡十三日而罷 10월 爲文祭權荷塘先生 改葬時
66세 7월 小山公訃至 送濟庵公 與子姪五人往哭 後又親往祭奠
71세 2월 大山先生 請享疏本成 以立祠高山事設 請享道會于花府 以薦先生製疏 李后山 見疏本歎曰 此老文章 如入海觀龍 不可測度
이와 같이 退溪와 大山에게 尊師 精神과 敬慕가 누구보다도 極盡하다. 大山에 대한 挽詞 한 수를 아래에 보인다.
先生生古昔 선생께선 옛날에 태어나셔서
摳衣朱退門 주자 퇴계 문하에 글을 배웠는데
應須莞一笑 반드시 한 웃음으로 응대하셨고
不待有多言 많은 말씀을 기다리지 않으셨다
脗合如符契 부계와 같이 이치에 부합하였고
融通徹底根 뿌리까지 철저히 융통하였네
身親覩快活 몸소 친히 쾌활함을 보았으니
破我識迷昏 나의 혼미함을 깨뜨리게 하였네
3) 自警自誡와 存心養性
선생은 學問과 敎育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스스로 경계하고 자신을 訓戒하는 것을 隨時로 행하였다. 이러한 自警自誡는 젊은 시절부터 考終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아래에 그 내용을 보인다.
36歲 正月 題春帖以自警 ‘帖曰 自今日以後 更作不可與人言之事 天其勿培 以降厥罪’
37歲 正月 操存銘成
38歲 英祖 38년 辛巳(1761) 正月 承大山先生誨批 書揭師訓以自警
‘其文曰 窮格工深 而理義昭著 踐履功至 而持守嚴密 眞實用力 而不容一毫之虛僞 積久純熟 而靡有一息之間斷’
8月 自誡目成 所知 所行 見師友 與衆賓處 各爲一項
45歲 英祖 45년 戊子(1768) 正月 首揭自誡
‘誡曰 今年工夫 迄可回頭 又曰 寧黙坐閑談 最害事’
書揭左右銘
先生言 天理人欲 互爲消長 無人欲不消 而天理張旺之理 無天理不接續 而人欲退聽之理 乃銘曰 ‘斷斷勿續 續續勿斷 斷處便是續 續處便是斷’
因書質于 大山先生
49歲 英祖 49년 壬辰(1772) 書揭左右以自誡 其文曰
‘辛卯如是 壬辰如是 過了 年齡易邁 志業日退 念之及此 自愧自歎而已’
又賦詩曰
受氣從初欠健充 長開門戶護寒風 好書在案聊醫病 莫遣餘閒到此中
55歲 書自誡云 ‘年近六十 不能制怒 或有疾言遽色 何足云乎’
69歲 4월 毋計劃 毋欲速 二箴成
70歲 正祖 17년 癸丑(1793) 正月 書座以自警
‘明鏡高懸 姸媸莫逃 止水無波 天雲交映’
74歲 6월 作反己詩 其詩曰
茅屋亦幽靜 모옥도 또한 그윽하고 고요해
淸風時或過 맑은 바람 때때로 지나간다네
自知用處小 스스로 쓰일 곳 적음을 알지만
所願善人多 소원은 착한 사람 많음이라네
只合付群物 다만 군물에 부합하려 하고
不須發浩歌 반드시 호가하려는 않는다네
兀然守坐席 올연히 좌석을 지키면서
心事問如何 심사가 어떠한가 묻노라
그윽하고 고요한 茅屋에서 淸風을 맞이한다는 것은 선비인 學者의 생황에 必須 不可缺한 것이다. 學問과 修養에 가장 알맞는 곳이다. 자신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도를 닦고 있으나, 쓰일 곳이 적음을 스스로 안다고 하였다. 이것은 자신의 謙辭임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이 누구보다도 善人에 해당되지만 또 善人이 많기를 원하고 있다. 善人詩에 나타난 정성과 같다.
이와 같이 先生은 聖賢의 學問인 爲己之學을 實踐함으로써, 師門의 推許를 얻어 學問의 眞訣을 傳受하였고, 나아가 當時 많은 선비들의 重望과 推仰으로 수많은 弟子들을 敎導하여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4) 以文會友 및 學問精進
선생은 젊어서부터 當時 嶺南의 學者들과 폭 넓고 깊게 交遊를 함으로써 자신의 학문을 더욱 精進시켰다. 당시에는 嶺南地方의 학문이 가장 旺盛했던 때이므로 이것이 쉽게 이루어 질 수 있었으리라 본다.
29세 3월 論 金蘭谷 江漢 李下枝 象辰 二公 四七辨
32歲 11월 見 九思堂 樂行 到家陪宿
33歲 4월 訥隱 李公訃至 爲位哭之
5월 和 申晦屛 體仁 贐行詩 時 先生有赴試之行 申公贈詩贐之 先生和之曰
窮餓元非吾輩病 騫騰讓作別人榮 滄江喚泊還堪笑 幾度城南聽曉鯨
35歲 9月 蘭谷金公 歷訪 一宿對話
40歲 8月 與李致道埦 論敬齋箴集說 及近思錄 屛銘發揮
41歲 與蘭谷金公 論中庸 首言道 中間以道與德 言末乃言德之義
43歲 11월 九思堂 金公訃至 爲位哭之
45세 正月 與柳蘆厓 叔文道源 講討 論孟庸學 章句集註之異
49歲 李后山 趙磨翁 進道 權弦庵 以肅 留宿講討
54歲 正月 趙磨翁 帶其弟 晩谷 述道 書而來訪
55세 11월 趙磨翁 來宿 書贈 月麓書堂韻. 鄭滄海 瀾 來訪.
鄭滄海 公이 내방하여 國內外를 旅行하였다는 자랑과 曠達自處하는 態度로써, 자신이 지은 詩를 보이며 求和을 청하자 선생은 응하지 않고 辭讓하였다. 그러니 鄭滄海 公은 선생을 戱弄하는 말을 함부로 하였으나 선생은 웃고 말았다.
뒤에 다시 찾아왔으므로 선생은 鄭公의 그릇된 생각과 행동에 대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도록 깨우쳐 주고, 傲慢한 마음을 바로잡는데 힘쓰라고 경계하였다.
‘鄭公 以曠達自處 不拘禮節 傲視一世 自云 壯遊八九月 登妙香 自箕都 渡鴨綠江 踏胡地而來 持金剛畵 及諸詩來示 因求和 先生以不能詩辭之 臨歸 鄭公戱之曰 旣疲癃而殘質兮 又重之以年老 鷄初鳴兮盥櫛 夫何爲乎 凡坐蘇湖 學問非不好兮 但恐貽憂於萱堂 先生笑而不答 然鄭公謂人曰 金川沙 座邊伸脚 偃臥甚不安 言語不敢放大 其見敬如此
辛丑又來 先生贈言曰 滄海公 方眸鐵脛 老而不衰 於山而盡白頭金剛之表裏 於水而窮豆滿鴨綠之源 不知脚下踏破 幾千萬中 眼中看破 幾千萬里 所歷幾千萬危險 所見幾千萬靈怪 滄海雖爲我說與 我非滄海 安知滄海之所得耶 然山水之費盡造化 漏泄天機處 固無逃於滄海之領略 若其朝暮之山 雲靄蒙鬱 莫能窺其涯際 入海之水平穩 淵靜不少 露其氣力 向之千萬狀 到此方有餘味 滄海果能 住脚看眼於此否乎 滄海勉之’
56세 2월 哭蘭谷 金處士 先生 爲位而哭 有哀辭
57세 11월 與趙友愿 講心經
58세 正月 崔百弗庵 興遠 命孫湜 袖書而至 先生 答而謝之
2月 趙晩谷 來訪 先生因邀 冠從子 彦光 請字辭以道意
4月 共鄭南屛 賦高字 又琴字
59세 正月 鄭必奎 來見 因有從遊之意 2월 聞朴南野 孫慶訃 有挽詞
62세 正月 與李艮巖書 中庸論率性疑義 與申晦屛書 論致曲疑義 答艮巖 論率性書 2월 答鄭必奎書 別紙 論朱書疑義 3월 李黙軒 德而 萬運 來訪
10월 擬與李后山書 論朱書刊補
63세 7월 聞崔百弗庵訃 爲位而哭 有挽祭
64세 2월 答柳東巖論自慊書 4월 李后山 留宿講討 率性之謂道說曰 ---
65세 5월 南損齋 漢朝 來訪 6월 哭趙磨翁 先生痛哭良久 有挽詞 與柳東巖別紙 論儀禮 攝祀孫 持心制 朝祖 魂帛奠 諸條 又辨心經 操一操義
66세 9월 哭李艮巖 艮巖在京 得病而逝 先生 如喪同氣 有祭文 12월 李黙軒 來訪 三宿討話
68세 6월 哭柳蘆厓 有祭文
69세 4월 答柳東巖書 論啓蒙 6월 答金山齋定東書 論中和疑義 10월 金龜窩 權酉嶺 思浩 李暘谷 述靖 李俛菴 李直村 宇綱 會孺子亭賦詩
72세 10월 與金雨皐道行書 時霽山先生 有昭伸蕩滌之典
73세 7월 答李后山人心道心別紙 8월 答李后山書 論大學治國章 答李俛菴 仁義中正主靜書
이와 같이 年譜에 言及된 交遊 學者들은 대강 剛窩 任必大, 蘭谷 金江漢, 下枝 李象辰, 九思堂 金樂行, 訥隱 李光庭, 晦屛 申體仁, 艮谷 李埦, 蘆厓 柳道源, 后山 李宗洙, 磨翁 趙進道, 弦庵 權以肅, 晩谷 趙述道, 滄海 鄭瀾, 趙友愿, 百弗庵 崔興遠, 鄭南屛, 南野 朴孫慶, 黙軒 李萬運, 東巖 柳長源, 山齋 金定東, 龜窩 金宏, 酉嶺 權思浩, 小山 李光庭, 雨皐 金道行 등이다.
3 子姪 및 弟子 敎育
선생은 自身이 學問하는 여가에 子姪과 弟子들의 敎育에 全力을 다하였다. 年譜에 나타난 것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에 그 대강을 整理해 보인다.
36세 11월 季弟 濟庵公 宗燮의 冠禮를 행하다.
‘戒賓于 大山先生 先生爲賓 先生之胤致道爲贊 宗九爲儐 宗敬執禮 宗發執事 頗有古人之儀 月城 李景顔 達成 崔士敎 俱來參 便成一家勝事 以悅親意’
41歲 治家法을 써서 子姪들에게 보였다. 집안을 다스리는데 있어서는 敎法이 첫째이고 農業에 힘쓰는 것이 다음이며 儉約이 셋째라 하여, 이 세 가지가 잘 갖추어 지면 저절로 久遠한데 이를 것이라 하였다.
內外의 구분을 엄하게 하는 것을 最初의 가법으로 삼아야 할 것이고, 報本에 薄하면 집안이 오래갈 수 없으며, 다만 物質에 있는 것이 아니라 精誠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정성만 있으면 物質이 비록 薄하다해도 薄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거처하는 집을 가려서 사는 법을 提示하였는데, 郡邸 옆에 살지 말아야 하는 이유 다섯 가지를 들어 경계하였다. 첫째는 벼슬아치들에게 나아가 알현할가봐 두렵고, 둘째 倡妓들과 가까이하며 사랑할가봐 두렵고, 셋째 鄕論을 操縱할가봐 두렵고, 넷째 雜輩들과 무리 지을가봐 두렵고, 다섯째 浮華한 것을 사모하고 본받을가봐 두렵다고 하였다.
‘敎法爲首 農務次之 儉約次之 三者備則 自至久遠 嚴內外之分 爲最初法 好動非保守家法 未有薄於報本 而久其家者也 不但在物 誠爲本也 有誠則 物雖薄 而非所謂薄也 又書示擇居法 擇居不可當郡邸 一恐趨謁管掌 二恐褻狎倡妓 三恐操縱鄕論 四恐締結雜伍 五恐慕效浮華’
42歲 著敎小兒法以自誡 凡數十條
‘其略曰 敎小兒 一番授後 亦須使之放敎 平心熟讀 若逐句逐字 一一摘覈 使之終日 困瘁於繩檢之中 則亦大害事 ◎朝起方授課業時 宜正衣冠 危坐延接 而尤要沈靜 屛却雜務 但權用十分和誘勸獎 ◎小兒如方長之木 決不可隨事沮抑 以遏其氣 然徒蔽於愛 而重違其志 使之凌駕長者 侵侮同類 或與食物玩好 必盛大充欲 或有憤怒 必誘奉慰解 則非但才不成 亦爲不孝矣 ◎敎子私意 大害事天 不必爲吾子 煞敎特異 亦不必爲 吾子另致純濁 只以吾子置於衆人之中 只把敎他子之心養 吾子則自然長得他’
小兒를 가르치는데는 한번 가르친 뒤에, 폭 넓게 가르쳐서 편안한 마음으로 숙독하게 할 것이며, 만약 逐句逐字 하나하나 摘覈하여 終日토록 시키는 것은 대단히 해로운 일이라 하였다.
小兒는 이제 막 자라는 나무와 같아서 결코 일에 따라 抑制하거나 돋아나는 기운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랑에 가리어 그 뜻을 어기거나, 어른과 同類를 업신여기게 하는 일은 없도록 하여야 하며, 食物을 즐기고 좋아하는 일, 큰 욕심을 채우려는 일 등도 경계하여야 한다.
57세 5월 赴湖上冠禮 時大山先生 將冠孫秉運 命以三加之事 使俛庵우奉書而請 先生進之湖齋行禮 大山先生 又字祝 先生製送 大山先生 答書而賀之
7월 答族姪學進 心經問目 10월 李秉運來受學 大山先生 命秉運持贄請納拜 且爲書而托之
61세 3월 與子慶進 日講朱書節要 閏三月 曺近稷 來見 因有請學之意
11月 說朔望講于 后山精舍 李秉運來 講大學或問
63세 4월 朴世賢 來請業 講心經 7월 答李元黙書 論虛靈不昧義 10월 與李元黙 金弼秉 李致宅 講論語 12월 與李昌發 講大學
64세 6월 答鄭必奎辨義 論朱書節要 10월 答李鎭九喪禮問目 南廈陽來講 自是至十二月 連講大學中庸
66세 11월 李元黙 來棲孺子亭 講中庸
68세 9월 鄭必奎 來留 講太極圖說 淸進同參 洪浚源 講大學 曺近稷 講家禮
11월 徐活 來講大學 李秉運 秉進 秉遠同參
12월 哭濟庵公 先生痛曰 吾身亦死矣 有祭文 又撰家狀 濟庵公 臨化極整齊 無錯亂悽黯 先生泣訣而出 斂袵更入曰 汝之爲古人所罕 吾乃言語掩抑 坐立輕遽 汝必不滿於心 玆欲以敬謹之容 更見汝矣 其造次必於是如此
69세 정월 李心淳 來留講大學 因及或問 金弼秉 李秉進 同講 3월 答李秉運 或問問目 與趙友慤 講退陶集 9월 命經進代寫心經刊補
70세 11월 與李野淳心淳 移居孺子亭 講退陶書 淸進 川進 柳樂祚 同參 李秉運 秉進來 講心經
71세 4월 答李野淳 喪禮問目
72세 3월 南漢皜來訪 漢朝之族弟 篤志向學 有多少講問 12월 徐活來 講心經
73세 7월 黃㶅來 講論語 㶅靑鳧府 靑雲人也 忠實無華 向學誠篤 請學 先生嘉其意而納之 11월 李秉夏來 講學 金弼秉來 講論語
74세 3월 書誡示孫養觀 首書 朱子誨 長子受之 諸條繼之曰 僭言而書示之 凡十四條 淸進川進 繼講論語
이와 같이 선생은 평생동안 子姪들을 비롯한 많은 弟子들을 가르쳐 왔다. [先生文集]에 門人錄이 따로 없지만, [孺子亭及門錄]이라 하여 筆寫本으로 만들어 전하는 것이 있으므로 아래에 덧붙여 둔다.
孺子亭及門錄 座目
金宗臣 癸丑生 先生從弟 進士 有文集
金誠應 號 西坡 先生族叔 進士 有文集
金宗錄 丁卯生 號 含忍齋 先生族弟 有文集
金宗駿 丁卯生 號 芹谷 宗臣弟 進士 有文集
李慶漢
李光票 載寧人 先生從侄婿
金敬進 丙子生 先生族姪 有文集
金樂進 壬辰生 號 杏南 先生族姪 有文集
金慶進 甲寅生 號 聲灘 先生子 有文集
金章進 甲子生 先生族姪
鄭 璞 號 南屛
李宗周 癸酉生 號 北亭 進士 有文集 居安東 法興
金耕進 戊辰生 先生族侄
柳樂祚 豊山人 先生甥侄
李野淳 眞城人 號 廣瀨 官至掌樂院 注簿 有文集 居禮安 下溪
任伊輔 居禮安
李 경 韓山人 居安東 蘇湖
李秉運 韓山人 號 俛齋 官至縣監 有文集
金淸進 丁丑生 號 七松 耕進弟 進士 有文集 先生考終日記
金原進 戊寅生 先生侄
金百進 癸未生 先生再從侄
金基進 辛酉生 先生族姪
權得仁 安東人
權顯仁 安東人
李 헌 韓山人 居安東 蘇湖
金川進 己卯生 先生侄
金養誠 壬午生 先生族孫 基進子
金海進 癸未生 號 晩修 宗祿侄 有文集
柳崧祚 豊山人 先生甥侄 樂祚弟
金養德 丁亥生 基進子
金養駿 丙戌生 號 光明堂 章進子 有文集
李秉進 韓山人
朴周元
柳同春 豊山人 先生婿 居安東 河回 號 愛淸軒
李元黙
金經進 丁亥生 號 白室 先生侄 有文集
李致宅
李彙發
李秉遠 韓山人 號 所庵 秉運弟 官至縣監 有文集 居安東 蘇湖
李 堒 韓山人 居安東 蘇湖
李以侃 廣州人 先生侄壻 居漆谷 石田
李巖淳 眞城人 野淳弟 居禮安 下溪
吳以顯
南正宅 英陽人
金㫌進 甲午生 章進弟
金誠進 戊子生 號 西塢 進士 敬進弟 有文集 又號 嗒然子
李 墺
李相晟
金沂進 辛卯生 號 芝山 海進弟 有文集
金觀進 辛未生 先生族侄
金周進 乙酉生 號 懶翁 先生族侄 有文集
金師進 甲申生 觀進弟
金陽進 壬午生 先生族侄
金恒進 丙戍生 陽進弟
權中時 安東人
金養休 丁酉生 號 栗園 樂進子 有文集
金養周 乙巳生 號 困齋 養休弟
朴進源
鄭必奎 淸州人 號 魯菴 有文集
徐 活 達城人 號 邁埜 有文集 居靑松 馬坪
趙友愿 漢陽人 字恭甫 號 隨軒 居永川 辛未生 東淵 鄭伯休弟子 本烏川
趙友慤 漢陽人 號 蒼軒 友愿之弟 有文集 安東 吉安 奈川派
李定秀 固城人 先生孫壻
鄭鳳休 延日人 先生孫壻 居永川 梅谷
柳趾休 完山人
柳聲祚 豊山人 同春子 居安東 河回
金弼秉 義城人 己丑生 號 龜陰 字 彝則 有文集 居安東 龜尾
李庭芝 固城人 居安東 法興
李秉夏 韓山人 號 信菴 有文集 居安東
李秉殷 韓山人 秉夏弟
金三進 戊戌生 先生姪
金堂進 辛未生 號 慤齋 先生從侄 有文集
金山進 辛卯生 先生侄
金萬進 乙未生 百進弟
金養淳 癸巳生 養休兄
金寬進 丙戌生 宗祿子
金養穆 甲午生 樂進侄
金養久 甲戌生 號 槐軒 先生族孫 有文集
金馨進 辛酉生 號 槐陰 先生族姪
金養直 壬戌生 先生族孫 進士
金崧進 乙卯生 號 止軒 先生族侄 有文集
金養駉 丁酉生 號 三苟堂 㫌進子 有文集
金宗鐸 戊戌生 先生族弟
金養晦 丁亥生 馨進侄
金鴻運 義城人 居安東 川前
金 瑞
申冕周 鵝洲人 號 市南 官至同副承旨 有文集 居義城
金 坤
李三秀
朴龜寧 咸陽人 先生侄壻
洪濬源
洪 瑗 南陽人 埏弟
任說輔
金弼成
金養明 辛丑生 基進子
金鼎裕 庚子生 先生族曾孫
金喆進 辛丑生 宗駿子
金翼進 壬午生 樂進從弟
金濟裕 庚寅生 養直子
朴世賢
金宏運 義城人 先生侄婿 居安東 川前
申鼎辰
金始寅 義城人 參奉 居安東
金庭進 戊子生 宗臣子
金彦裕 辛丑生 濟裕弟
金彦光 乙酉生 先生從侄
柳綿祚 豊山人
南夏陽
柳遠睦
權百度 安東人 先生侄壻 居安東 酉谷
徐 瀅 達城人 活弟 居靑松 馬坪
李在嵩
李昌發
金養中 辛卯生 先生族孫
金宗斌 乙亥生 號 沙窩 先生族弟 有文集
金豪進 癸巳生 先生族侄
李致馨
白始東
金星老
李義綱
鄭必應
鄭世禾
權星耈
洪 珽 南陽人 先生甥侄
黃 㶅 號 晩翠洞 世稱黃處士 有文集 居靑松 靑雲
金養觀 丙申生 號 錦湖 先生孫 有文集
金明進 癸酉生 宗鐸子
金養心 丙子生 崧進子
金養素 甲申生 馨進子
金學進 丁丑生 先生族侄
以上 130人
4 결론
이상에서 先生의 生涯와 敎育에 대한 一面을 대강 살펴보았다. 川沙 金宗德 先生은 朱子와 退溪 學問의 嫡通을 이어 받은 大山 李象靖 先生의 高弟子로서 평생을 學問과 敎育에만 專念하였다.
선생은 初年부터 鄕解兩試, 生員會試, 別科鄕試 등에 합격하였고, 51세에 東堂鄕試에 합격하여, 네 번이나 科擧試驗에 합격하였으며, 道學으로 道伯의 薦을 받았고, 學行으로 薦을 받아 義禁府都事에 除授, 마지막 僉知中樞府使를 除授받았지만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學問과 敎育에만 뜻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스승인 大山先生과 退溪를 높이고 思慕하는 精誠이 남 달랐음을 선생의 일상생활에서 잘 찾아 볼 수 있었다. 詩를 통해서 自身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고, 직접 大山先生을 자주 모시면서 親炙를 받은 적이 무수히 많은 것이 感動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선비로서 子姪들과 弟子들에 대한 敎育을 疏忽히 한 사람이 없겠지만 그에 대한 努力은 어느 누구도 따르기 힘든 것이었으며, 자신의 學問과 修養을 위한 自警 自誡와 存心養性에 대한 心力은 聖賢들의 길을 그대로 따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孺子亭과 及門錄을 보면 斟酌할 수 있으나 필자는 다만 선생의 生涯와 敎育의 一端만을 대강 살펴보았으므로 선생의 깊은 학문과 文學思想에 대한 考察이 너무나 未洽함을 自認하면서 後學들에 대한 期待를 거는 것이다. (2005.9.18.)
以下 除外
1) 儒佛思想 相反相似
선생 [年譜] 59歲條와 [文集 권 17 序]에 釋學正贓序가 있는데, 釋學과 儒學의 相反点과 相似点에 대하여 論한 것이다. 그러나 文集에는 序文만 있을 뿐 釋學正贓의 本文은 전하지 않는다.
‘釋學正贓序 略曰 夫釋學之與儒學 有大相反處 有大相似處 其大相反者何也 無三綱五常之倫 無冠冕衣裳之制 此其反易而遼越者也 其大相似者何也 有知心見性之妙 有修行謹法之效 此其依俙 而彷佛者也 於其相反則 粗而易知 是以苟非陷溺之甚者 皆知禮樂之可尙 而寂滅之不足慕 倫常之可守 而逃絶之不足法 先王之法服在身 知毁冠裂裳之爲可惡 日用之事物燦然 知藏形匿跡之爲不祥 有不待賢知而後能之也 惟於其相近則 微而難辨 是以雖誦習聖人之書 循蹈聖人之制 終日不離於儀章 度數之中 毅然爲士君子之身 其見解 操執僅占 得彼之與我 相似之一半 而夾雜其不相似之一半 終不免和泥帶水 假鐵陶金 則外面是毅然士君子 而便做冠冕之老 釋室家之沙門云云’
2) 政治思想
61세 政本序略曰 在心爲天德 著行爲王道 由是心而制是道 爲政也立是心 明是 道 而敷是政者 是諸唐虞而三代繼之 考之文字則 有書經在爾 溯而究之 凡理欲之分 存省之方 了然於二帝三王之心 而修齊治平之道 生養敎治之政 燦然矣 以其了然燦然者 而形之於言 便如滴水成凍 不待言句之多 而節度該盡 本末通貫 天地之化 無不足也 使循而讀之者 皆如二帝三王 則一撫卷 而又了然 而燦然 惟其世代漸降 不能皆如二帝也 三王也則 夫以舜之命禹 而猶不能不益於 堯之一言 况其下者 只守上古 質奧之辭 而求通而從 而入之不其難乎 自孔子以後 諸聖賢隨世 而漸益其說 非求多也 發明古旨 俾後人曉解 勢不得不爾也 後之學者 厭古書之難 通喜近說之易解 不知道統貫通之妙 而疑其聖學 始起於孔孟 而明於程朱 以爲求仁之端 啓於孔子 操舍之幾 判於孟子顔子 始知勿字之功 而曾子方得 三省之力 至於主敬 乃曰程夫子 開示旨訣 而至朱夫子 大煞分明 若典謨訓命 則不過一言 以斷之曰 道政事而已 且粗解其爲帝王政令之本 而於學者工夫 則認有別般 要妙之法 噫演之爲後世 聖賢之說 約之爲典謨訓命之辭 相爲源流枝幹 而如敬之一字 唐虞三代 君臣勉戒之際 作爲宗旨 書經五十篇 此字最多 可知孔孟程朱之學 實自典謨訓命中發出 而總之爲一統也 使學者 身入其中 嚼破意味 因注解而求文義 因文義而求義理 庶幾見政與心 本無二致 而千古相傳之統 一以貫之也云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