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孤雲 崔致遠 先生의 四山碑銘에 對하여
慶北大 金 時 晃
1 序論
孤雲先生文集 卷二에 無染和尙碑銘 <幷序>과 眞鑑和尙碑銘<幷序>이 있고, 同書 卷三에 大崇福寺碑銘<幷序>과 智證和尙碑銘<幷序>이 登載되어 있는데, 이들 碑銘은 孤雲 先生이 唐나라로부터 귀국한 뒤 隱居하기 이전, 王命에 의하여 제작되었으며, 이들 碑石은 崇巖山 智異山, 初月山, 曦陽山에 있으므로 四山碑銘이라 한다.
蒙庵의 <<海雲碑銘註序>>에 의하면, ‘萬曆 年間에 鐵面老人이 <<孤雲集>> 10卷 속에서 네 碑文을 抄出, 가장 어려운 곳을 따라 약간의 註釋을 하여, 이를 佛敎 學人 들에게 誦習토록 하고자 했다 한다. 그래서 그들의 課外 讀本이 되다시피 했고, 그 뒤 蒙庵 등의 註가 있어 일반인들 사이에도 퍼졌는데, 純祖 憲宗 年間에 居士 洪景謨가 註解의 내용과 體裁를 一新하여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이 四山碑銘은 <<孤雲集>> 2,3卷에 있는 것을 비롯하여 異本 만도 10餘 種이나 되며, 註解書 또한 매우 많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 이에 대한 현대 학자들의 註解와 飜譯 및 硏究가 진행되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중에서 崔英成 敎授의 <<註解 四山碑銘>>과 <<崔致遠의 思想硏究>>는 대단한 업적으로 학계에 큰 寄與를 했다고 하겠다.
그밖에도 譯註書로서 李佑成 敎授의 <<新羅四山碑銘>>과 崔濬玉 編의 <<國譯孤雲先生文集 上,下>>가 있고, 本格的인 硏究書로는 劉永奉 敎授의 博士學位論文 <<四山碑銘硏究>>가 있다.
筆者는 이 四山碑銘에 대하여 공부한 것이 전혀 없고, 또 佛敎에 대한 조금의 常識조차 가지지 못했는데, 釜山의 坡田韓國學堂 金茂祚 博士로부터, 四山碑銘에 대한 글을 쓰라는 命을 받고 망설이다가, 이 기회에 本 碑銘에 대한 공부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기 어려울 것을 憂慮하여 감히 글을 써 보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시작하고 보니 워낙 어려운 글이라, 原文의 理解조차 힘들었지만 가장 훌륭한 우리의 보배로운 古典을 공부한다는 기쁨에 疲勞나 괴로움을 잊고 견디어 낼 수 있었다. 또한 崔英成 敎授를 비롯한 先學들의 연구에 크게 힘입어, 쉽게 공부할 수 있는 것이 큰 多幸이며, 매우 감사한 마음 금할 수 없다.
碑銘의 名稱과 論述 順序는 孤雲集을 臺本으로 하여, 우선 각 碑銘들에 대한 槪略的인 것을 정리하고, 碑文의 形式과 內容을 살펴 보며, 碑文 속에 담겨 있는 孤雲 先生의 思想의 一面을 알아 보는데 그친다. 앞으로 시간을 두고 좀더 깊이 천착할 것을 다짐하며, 先學들의 指導와 叱正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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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四山碑銘 槪觀
1) 四山碑의 形式
우선 四山碑의 所在地, 크기, 形式, 建立 年代, 寶物 指定 등을 살펴 보기로 한다.
(1) 無染和尙碑
所在地 : 忠淸南道 保寧郡 嵋山面 聖住里 聖住寺址
크 기 : 높이 4.55미터, 碑身高 2.52미터, 同幅 1.5미터
形 式 : 龜趺및 螭首는 花崗石, 碑身은 黑大理石이며, 新羅 時代 최대의 巨作이다. 龜趺의 일부에 損傷이 있을 뿐 다른 부분은 완전하다. 龜趺는 龜頭 이하가 埋沒되어 알 수 없으나, 幻想的인 怪獸形인데 細刻이라고 할만하다. 등에는 龜甲紋이 있고 中央에 碑座를 지고 있는데, 사면에는 내부에 雲紋이 彫刻된 眼象을 두고, 밑으로 큼직한 雲紋이 있다. 碑身은 완전한데 四角의 모를 죽였고, 上端은 양측에서 圓形으로 만들고 螭首를 받은 부분은 凸形을 이루었다.
螭首는 밑에 仰蓮을 刻하고 四面에 구름 속에 싸인 龍을 雄偉한 솜씨로 彫刻하였으며, 前面에 題額이 있으나 文字는 磨損되었다. 巨大한 外形과 混麗한 彫法은 신라 시대 비석의 대표작이다. 崔仁渷의 書로 歐陽詢體이며, 字徑은 1.5센티미터의 楷書이다.
建 立 : 眞聖王 4年 (890)
國寶 第 8 號
(2) 眞鑑和尙碑
所在地 : 慶尙南道 河東郡 花開面 雲樹里
크 기 : 높이 3.63미터, 碑身高 2.02미터, 同幅 1미터
形 式 : 龜趺 및 螭首는 花崗石, 碑身은 黑大理石이며, 碑身에 損傷을 입었으나 龜趺와 螭首를 具存하고 있다. 龜趺의 龜甲에는 넓은 구획선으로 六角의 龜甲文을 간결하게 淺刻하였을 뿐이고, 중앙에 높직한 碑座를 마련하였는 바 四面에는 雲紋이 있으며, 上面에는 碑身에 맞게 구멍이 뚫려 있다. 龜頭는 짧고 幻想的인 動物의 머리로 표현되어 新羅 후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碑身은 前面 左角 上部에 크게 缺落된 부분이 있고, 또 龜裂도 심하여 최근에 別株를 세워 수리하였다. 螭首는 兩側을 비스듬히 자른 三角形으로 四面에 爭珠한 龍이 있고, 전면 중앙에 方形으로 깊이 판 題額이 마련되어 ‘唐海東故眞鑑禪師碑’라 있고, 頂上에서 仰蓮 위에 寶珠를 얹었다. 碑文은 孤雲 선생의 撰書로 字徑 2.3센치미터의 楷書이다.
建 立 : 定康王 2年 887
國寶 第 47 號
(3) 大崇福寺碑
所在地 : 慶州郡 外東面 末方里에서 발견된 10여 개의 碑片이 落穗처럼 전해짐
建 立 : 眞聖女王 卽位初 (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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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智證和尙碑
所在地 : 慶尙北道 聞慶郡 加恩面 院北里 曦陽山 鳳岩寺 서쪽
크 기 : 높이 2.73미터, 넓이 1.64미터
形 式 : 片麻岩
建 立 : 景明王 8年 924 慧江書
寶物 第 138 號
2) 四山碑銘의 內容
四山碑銘의 序文과 銘의 內容을 段落별로 대략 간추려 본다.
(1) 無染和尙碑銘
이 碑銘은 ‘萬壽山 聖住寺 朗慧和尙 白月葆光塔碑銘’이라 한다. 무려 五千餘言에 달하는 이 碑文의 내용을 간략히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第 1 段落 : 和尙의 죽음과 哀悼 및 葬事를 한 뒤, 여러 弟子들의 요청에 의하여 王이 諡號를 ‘大朗慧’로 追贈하고, 塔을 白月葆光이라고 稱號를 내림과 同時에 崔孤雲 先生에게 碑銘을 지으라는 명을 내림.
第 2 段落 : 崔孤雲 선생이, 和尙의 首弟子인 苾蒭 및 門弟子들의 재촉으로 그들이 올린 行狀을 참고로 하여 碑銘을 짓기 시작함
第 3 段落 : 東方의 君子國에 우뚝하게 선 大師의 家系, 出生과 成長, 收養, 受學, 修道 過程, 入唐 遊學, 歸國 後의 活動, 및 永訣 등의 서술이다.
和尙의 法號는 無染, 諡號는 朗慧이고 俗姓은 金氏이며, 圓覺祖師(達磨)에게 10世 法孫이다. 武烈王이 그의 8代祖이고, 高祖와 曾祖는 將帥와 宰相을 지냈느며, 祖父는 眞骨 출신 周川으로서 官等은 韓粲이다. 어머니 華氏가 꿈에 긴 팔을 지닌 天人이 연꽃을 내려 주는 것을 보고 姙娠하여 열 석달 만인 新羅 哀莊王 元年 庚辰 (800)에 태어났다. 眞聖王 2年 戊申 (888)에 89歲(法臘 65歲)로 入寂하였다.
어려서부터 僧侶의 行實을 딲아, 불상을 그리거나 불탑을 쌓는 놀이를 하였고, 9세에 취학하여 神童이라 일컬었다. 13세에 佛道에 入門하여 雪嶽山 五色石寺의 法性禪師에게 수년 동안 배우다가, 浮石寺의 釋燈大德에게 나아가 華嚴經을 공부했다. 獻康王 13年 頃(821-822)에 唐나라로 건너가, 終南山의 至相寺에서 다시 華嚴을 배웠으나 곧 限界性을 깨닫고, 麻谷寺의 寶徹禪師에게 禪을 물어 印可를 받았다. 寶徹이 入寂한 뒤 사방의 古蹟과 高僧을 찾아 보고 오랫 동안 苦行을 닦았는데,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東方大菩薩’이라고 불리었다.
文聖王 7年 (845)에 歸國하여 原任大臣이었던 金昕의 請으로 熊川州의 烏合寺에 駐錫하니, 法益을 청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어 禪道가 크게 盛行했다. 이에 文聖王이 寺名을 ‘聖住’로 改稱하고 國師로 삼았는데, 獻康王 역시 國師로 禮遇를 다하였다.
聖住山 禪門의 開祖로서 禪風을 크게 振作한 그는 儒學에도 造詣가 깊었으며, 문장 또한 능했다. 門下에서 僧亮 普愼 詢乂 心光 같은 名僧들이 배출되었다.
第 4 段落 : 大師의 謙遜 柔順하고 慈悲로운 성품과 勤勉 儉素한 生活 및 弟子들에 대한 敎訓의 말씀, 門弟子 養成
第 5 段落 : 論評. 大師의 偉大性과 業績 稱頌.
第 6 段落 : 頌偈銘 9章 5言 70句 總 3500 字
(2) 眞鑑和尙碑銘
이 碑銘은 ‘智異山 雙溪寺 眞鑑禪師大空塔碑銘’이라 한다.
이 碑銘은 四碑 중에서 가장 짧아 2500 餘字에 不過하나 맨 먼저 이룩된 것이고, 先生이 중국에서 귀국한 뒤 곧 착수하여 定康王 2년(887)에 碑가 세워졌으며, 글씨 또한 선생이 직접 쓴 것으로, 歐陽詢 骨에 顔眞卿의 肉을 붙여 특색을 나타낸 것으로 神筆이라 한다.
이 碑銘의 내용을 段落別로 간추려 보면 아래와 같다.
第 1 段落 : 道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고, 사람은 다른 나라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이 佛敎나 儒敎를 배우는 것은 必然的이다. 儒敎와 佛敎 사상의 根本은 서로 다를 것이 없으며, 이러한 玄妙한 道를 傳하여 우리 나라를 빛낸 이가 禪師 이분이다.
第 2 段落 : 禪師의 生涯와 景行을 敍述하였다. 眞鑑禪師의 法諱(號)는 慧昭이고 俗姓은 崔氏이며, 그의 先代는 漢族으로 山東의 高官이었다. 隋나라가 軍士를 일으켜 遼東을 征伐하다가 高句麗에서 많이 죽자, 뜻을 굽혀 歸化하여 全州 金馬人이 되었다.
父는 昌原, 母는 顧氏인데, 낮잠을 자다가 꿈에 梵僧이 나타나 ‘나는 阿미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며 유리 항아리를 표적으로 삼아 주더니 이내 禪師를 姙娠하였다.
新羅 惠恭王 10年 甲寅 (774)에 태어나, 文聖王 12年 庚午 (850)에 77歲(法臘 41歲)로 入寂했다.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求法의 뜻을 지니다가, 哀莊王 5年 (804) 歲貢使의 배에 편승 入唐하여, 滄洲의 神鑑禪師에게 得度했는데 얼굴이 검다 하여 ‘黑頭陀’라 불리었다. 修道하던 중 唐에 먼저 와 있던 道義를 만나, 道友로서 함께 각지를 遍歷했고, 道義가 귀국한 뒤 終南山에 들어가 3년 동안 止觀을 닦았으며, 또 길거리에서 3년 동안 집신을 삼아 오가는 사람들에게 布施하였다.
興德王 5년 (830) 歸國, 尙州 露岳山의 長栢寺에 머물다가, 智異山 花開谷으로 가서 三法和尙이 세웠던 옜 절터에 禪堂을 다시 지었다. 閔哀王 元年 (838) 王이 만나기를 청했으나 만나지 않고, 再次 王이 使者를 보내어 ‘慧昭’라는 號를 내리고 王都로 나와 줄 것을 청했으나 거절하였다.
뒤에 智異山의 嶺南에다 玉泉寺와 六祖影堂을 건립했다. 入寂한 뒤 獻康王은 ‘眞鑑’이라는 諡號와 ‘大空虛’라는 塔號를 내렸으며, 定康王은 玉泉寺의 이름을 ‘雙溪’로 改稱했다.
第 3 段落 : 禪師의 質朴한 性品과 儉素한 생활을 敍述
第 4 段落 : 銘 4言 40句 160字
(3) 大崇福寺碑銘
이 碑銘은 ‘初月山 大崇福寺碑銘’이라 한다. 崇福寺는 景文王의 母后인 昭文王后의 外叔이며, 景文王妣인 肅貞王后의 外祖父인 波珍飡 金元良이 세운 절이다. 절의 建立 연대는 대개 憲德王 이전으로 推定하며, 위치는 慶尙北道 月城郡 外東面 末方里에 해당되는데, 절에 고니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처음 ‘鵠寺’라 하였다가 나중에 崇福寺로 고쳤다 한다.
元聖王의 因山을 당하여 鵠寺의 자리가 風水說에 의한 吉地로 採擇되어, 절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건된 鵠寺는 절다운 형태를 갖추지도 못한 데다, 憲德王의 弑害로부터 몇 代에 계속되는 王位 爭奪戰과 각지에서 일어나는 叛亂 등으로 인하여, 오랫 동안 버려지다시피 하였다.
그러던 것이 景文王이 卽位하고 나서, 元聖王의 夢感을 얻었다 하여, 鵠寺에서 講會를 열게 하고 절을 重刱하여 元聖王의 冥福을 빌어 주게 하였다. 그리고 獻康王 11년(885) 王이 寺名을 ‘大崇福寺’로 고치게 했으며, 당에서 갖 돌아온 孤雲 선생에게 寺碑銘을 짓도록 하였다. 그러나 獻康王 定康王이 2년 사이에 잇달아 昇遐하는 바람에 眞聖王 때 비로소 碑文이 이루어 지게 되었다.
이 碑는 신라 왕실에서 세운 사원의 내력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碑의 내용을 段落별로 간추려 본다.
第 1 段落 : 王者의 仁德과 太平勝地인 東方의 仁을 讚揚
第 2 段落 : 崇福寺의 起源과 移建 經緯 및 過程
第 3 段落 : 절의 重刱 動機 -乃見 聖祖大王(元聖王) 撫而告- 및 重刱한 後의 아름다운 景觀, 華嚴大德인 決言이 王旨를 받들어 法會를 열고 佛經을 講한 經緯와 鵠寺를 崇福寺로 易榜케한 獻康王의 峻德과 碑銘을 지으라는 王命에 의해 碑文을 지음.
第 4 段落 : 銘 4言 8章 64句 256字
(4) 智證和尙碑銘
이 碑銘은 ‘曦陽山 鳳巖寺 智證大師 寂照塔碑銘’이라 한다.
이 碑文은 孤雲 先生이 眞聖王 7년(893) 頃에 완성한 것으로 推定하는데, 30여년 뒤인 景明王 8년(924)에 碑가 세워 졌다. 碑文의 내용은 序와 銘으로 내용을 간추려 본다.
가. 序 : 新羅의 佛敎를 三期로 나누어 敍述하고, 大師의 生平을 서술하였다.
第1期 ; 東方의 仁心이 佛이요, 부처는 곧 能仁이다. 郁夷의 柔順한 性源을 引導하여, 迦衛의 慈悲로운 敎海에 이르도록 하였다.
第2期 ; 三國時代 百濟 高句麗 新羅의 佛敎의 傳來 過程을 서술
第3期 ; 長慶初 北山 道義의 歸國으로 禪宗의 輸入 및 그 發展 過程, 南岳 洪陟大師의 活動과 偉大함. 中國에 歸化한 靜衆寺의 無相과 常山의 慧覺, 大安寺의 慧徹國師, 慧目山의 玄昱, 智力 聞, 雙溪寺의 慧昭, 新興 彦, 涌0 體, 珍無 休, 雙峯寺의 道允, 崛山寺의 梵日, 兩朝國師인 聖住寺의 無染등은 菩提의 宗師로서 德이 두터워 衆生의 아버지가 되고, 道가 높아 王者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에 가지 않고도 道를 이룬 賢溪山 智證大師의 略傳이다. 智證和尙의 字는 智詵, 號는 道憲이고, 諡號는 智證, 塔號는 寂照인데, 俗姓은 金氏이며 慶州人이다. 아버지는 贊環, 어머니는 伊氏로서, 憲德王 16年 甲辰(824)에 태어나, 獻康王 8年 壬寅(882), 59歲(法臘43歲)로 入寂했다.
키가 여덟자 남짓했고, 얼굴이 한자 쯤이었으며, 儀狀이 뛰어났다. 사람들의 귀를 치켜 세우도록 한 여섯 가지의 이상한 感應과 사람들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던 여섯 가지의 옳은 操行이 있다.
姙娠 400日을 지나 灌佛會의 아침에 奇異하게 誕生함을 비롯하여, 어머니의 기이한 젖먹이, 9歲에 父親을 여의고 浮石寺에 들어가 佛道를 닦은 孝誠, 17세 때 瓊儀律師에게 具足戒를 받고 마음을 勉勵한 것의 奇異함, 꿈에 普賢菩薩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는 삼베 옷을 입고 자신을 단속함의 이상함, 산길을 가다가 나뭇군의 말을 듯고 훈계를 내린 것의 이상함 등이 여섯 가지의 이상한 感應이다.
다음 여섯 가지의 옳은 操行은 첫째 進退[行藏]의 옳음, 둘째 보답을 아는 것의 옳음, 셋째 施主로서 喜捨한 것의 옳음, 넷째 선심을 개발한 것의 옳음, 다섯째 세상에 나가서 교화하고, 물러와 도를 닦는 것의 올음, 여섯째 取捨의 올음이다.
禪師는 慧隱禪師에게 禪法을 傳受하여 雙峯四祖(道信)의 來孫 弟子가 되었다. 景文王 4年(864)에 王이 使者를 보내어 불렀으나 가지 않았으며, 同王 6年(864)에 賢溪山 安樂寺의 住持가 되었다. 獻康王 때 沈忠이란 佛者의 懇請으로 曦陽山 중턱에 鳳巖寺를 創建하였는데, 임금이 使者를 보내, 주위의 땅을 정하여 절에 붙여 주고 ‘鳳巖’이라는 寺名을 내렸다. 獻康王이 宮中으로 맞아 들여 王師로 삼았으나 사양하고, 산으로 들어갔다가, 病으로 安樂寺로 옮겨 갔는데, 冬 12月 旣望 이틀 뒤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이틀 밤을 넘겨 賢溪山에 임시로 遺體를 모셨다가 1년 뒤 曦野로 옮겨 葬事하였다.
太傅王은 問病과 營齋를 命하고, ‘智證禪師’란 諡號와 ‘寂照’라는 塔號를 내림과 동시에 孤雲 선생에게 碑銘을 짓게 했다.
禪師는 唐나라에 遊學하지 않았으며, 他 禪門이 南宗 계통의 禪(南禪)을 받아 왔던 데 비해, 그는 南禪보다 앞서 傳來된 北宗 계통의 禪(北禪)을 이어 받고, 거기에 南禪 까지 收容함으로써, 독특한 禪門을 開創하였다.
나. 詞<銘> : 七言 聯句 [柏梁之作] 44句 308字
崔英成 敎授는 <<註解 四山碑銘>> 에서 “이 비문의 형식은 序와 銘에다 陰記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비문의 전체 내용으로 보아, 陰記 부분이 序 안에 들어 있어야 마땅할 것인데, 따로 떨어져 있어 마치 附記처럼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된 까닭을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처음부터 孤雲이 그런 형식을 취했으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고 하였다.
그런데, 民族文化推進會 刊 <<韓國文集總刊>> 1 의 孤雲集 卷三에는 序 안에 崔敎授가 말한 陰記가 연달아 있고, 그 다음에 銘이 있어 아무런 이상이 없다. 碑石에는 序 銘 陰記 순으로 새겨져 있는지, 필자가 아직 살펴 보지 못했다. 그래서 부득이 본고에서는 孤雲集의 형식을 따랐다.
3 四山碑銘에 나타난 孤雲 思想
山陽病衲은 <四山碑銘跋>에서 ‘우리 동국이 비록 바다 밖의 거칠고 궁벽한 지역이나, 그 文明의 재주는 실로 중국에 사양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학문이 儒敎 및 佛敎와 통합에 이르러서는, 명성이 夷狄과 華夏에 떨쳐, 고요한 무차별의 상태[寥天一]로 복귀했는바, 중국 遊學에서 진리를 찾아 낸 이는 우리 孤雲이 그사람이다’ 하였다.
四山碑銘 속에는 이러한 孤雲 先生의 여러 가지 사상이 모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겠다. 哲學, 儒敎, 佛敎, 道敎, 歷史, 政治, 經濟, 敎育, 文學 등 多樣한 면을 살펴 볼 수 있으나,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부분만 고찰하려 한다.
1) 東方 思想
孤雲 先生은 신라 경주의 沙梁部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12세에 父親의 당부를 받고 商船으로 唐나라에 유학의 길을 떠났다. 入唐한 뒤 부지런히 노력하여 마침내 6년 뒤인 18세(874) 때 賓貢科에 及第하였다.
그리하여 20세(876)에 溧水縣尉가 되었는데, 이 때에 더욱 부지런히 학문 硏究와 著述에 힘써 <<中山覆簣集>> 5권을 이룩했고, 黃巢의 亂 때 高騈 麾下의 從事官이 되어 文章으로 대공을 세움으로써, 都統巡官 承務郞 殿中侍御史 內供奉의 영광과 이름을 날렸다.
28세(884)가 될 때까지 약 16년간 唐나라에서 활동하다가, 唐 僖宗(乾符帝)의 명을 받아 使臣의 형식으로 귀국하여, 獻康王에게 侍讀 兼 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監의 職을 받고, 故國에서 마음껏 抱負를 펴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 귀국한 뒤 王命에 따라 이 四山碑銘을 지으면서 항상 ‘東方의 君子國 빛나는 新羅’를 곳곳에서 언급하고 强調하였다. 특히 東方에 사는 仁者의 나라라는 自負心을 나타내었고, 하늘이나 부쳐가 특별히 恩澤을 베풀었음을 믿고 있었다. 이러한 선생의 사상이 나타난 것을 碑銘別로 다음과 같이 간추려 본다.
(1) 無染和尙碑銘
“光盛且實 而有暉八紘之質者 莫均乎曉日 氣和且融 而有浮萬物之功者 莫溥乎春風 惟俊風與旭日 俱東方自出也 則天鍾斯二餘慶 岳降于一靈性 俾挺生君子國 特立梵王家者 大師其人也”
(빛이 왕성하고 충실하여 온 누리를 빛나게 하는 바탕으로는 새벽 해보다 고른 것이 없고, 기운이 화하고 무르녹아 만물을 기르는 공효로는 봄바람 보다 넓은 것이 없다. 이 큰 바람과 아침 해는 모두 東方에서 저절로 나온 것인데, 하늘이 이 두가지 남은 경사를 모으고, 산악이 신령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을 내리어, 그에게 君子國에 빼어나게 태어나 梵王家에 우뚝하도록 하였으니, 大師가 바로 그 사람이다.)
無染和尙碑文에서 無染和尙의 자취를 敍述하는 첫 머리에, 和尙이 태어난 나라 新羅를 위와 같이 찬양하였다. 곧 新羅는 새벽에 온 누리를 밝게 빛내는 햇빛이 솟아 오르고, 和氣가 무르녹아 萬物을 育成시키는 봄바람이 불어 오는 東方의 나라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갗추고 그것을 한데 모아, 하늘이 靈性한 사람을 내리어, 이 東方 君子의 나라에 빼어나게 誕生시킨 사람이 바로 大師라고 하여, 君子國에 태어났음을 강조하였다.
선생의 東方 思想에 대한 바탕을 알기 위하여 東方, 東夷, 君子國 등에 관한 記錄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
(羲仲에게 따로 명하여 嵎夷에 살게 하니 곧 暘谷이란 곳이며, 삼가 해가 뜨는 곳으로 인도하여 질서를 세워 봄 농사를 잘 짓도록 하였다.)
“王制云 東方曰夷 夷者柢也 言仁而好生 萬物柢地而出 故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 不死之國焉 夷有九種 曰畎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故孔子欲居九夷也 昔堯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皆日之所出也 --- 論曰 --- 故東夷 通以柔謹爲風 異乎三方者也 苟政之所暢 則道義存焉 仲尼懷憤 以爲九夷可居 或疑其陋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亦徒有以焉爾”
(禮記 王制에 이르기를 ‘東方을 夷라 한다’고 하였다. 夷란 根本이다. 그 의미는 夷가 어질어서 생명을 좋아 하므로, 만물이 땅에 근본하여 産出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夷는 天性이 柔順하여 道理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君子國과 不死國이 있기까지 하다. 夷에는 아홉 종류가 있으니, 畎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孔子도 九夷에 살고 싶어 하였다. 옛날 堯임금이 羲仲을 嵎夷에 살도록 명하면서 暘谷이라 하였으니, 그 곳은 대체로 해가 돋는 곳이다. --- 논하기를 --- 그러므로 동이는 모두 부드럽고 삼가는 것으로 風化되어, 三方과는 다른 것이며, 참으로 政敎가 暢達되면 도의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仲尼가 憤然히 九夷에 가서 살려 하였더니, 어떤 이가 그 곳이 더러운 곳이 아닌가 하므로, 孔子가, ‘君子가 살고 있으니, 어찌 그곳이 더럽겠는가’ 한 것도 특히 그런 까닭이 있어서인 것이다.)
<<舊唐書 列傳>>에 보면, 唐 玄宗은 新羅에 대해 다음과 같이 君子國임과 學術을 認定하고 讚揚하여 警戒하였다.
“上謂璹曰 新羅號爲君子之國 頗知書記 有類中華 以卿學術 善與講論 故選使充此 到彼宜闡揚經典 使知大國儒敎之盛 又聞其人多善奕碁 因令善碁人 率府兵 曹楊季鷹爲璹之副”
(임금이 璹에게 말하기를 ‘新羅는 君子의 나라라 불리며, 학문을 매우 잘하여 中華와 類似한 데가 있소. 卿의 學術이 講論에 능하기 때문에 이번의 使臣으로 선발하여 보내는 것이니, 그 나라에 가서 經典을 闡揚하여 大國의 儒敎가 성대함을 알게 하오.’하였다. 또 그들 중에는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 바둑에 능한 率部兵曹 楊季鷹을 邢璹의 副使로 삼아 보냈다.)
이와 같이 <<書經>>을 비롯하여 <<後漢書>> <<唐書>> 등 中國 歷史書의 곳곳에서 東方의 나라, 해가 솟아오르는 곳, 어질고 착하며 유순한 君子國을 칭송하고 있다.
그리고 孤雲 선생 자신도 이에 대하여 禮記, 漢書, 爾雅, 尙書 등에 있는 것을 인용하여, <善安住院壁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王制 東方曰夷 范曄云 夷者柢也 言仁也 而好生萬物 柢地而出 故天性柔順 易以道御 愚也謂夷 訓齊平易 言敎濟化之方 按爾雅云 東至日所出 爲大平 大平之人仁 尙書曰 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平秩東作 故我大王之國也 日昇月盛 水順風和 豈惟幽蟄振蘇 抑亦句萌鬯懋 00生化 出震爲基 加復姬詩 擧西顧之言 釋祖始東行之步 宜乎九種 勉以三歸 地之使然 天所假也”
(--- 나는 夷의 뜻을 平易와 같이 해석하여, 敎育과 感化하는 방법을 말한 것이라 본다. 또 <<爾雅>>에 보면 ‘동쪽으로 해뜨는 곳에 이르면 그곳이 大平이다. 大平의 사람은 어질다.’고 하였고, --- 그러므로 우리 大王의나라는 太陽처럼 上昇하고, 달처럼 旺盛하며, 물은 순조롭고 바람은 온화하다. 어찌 다만 깊이 움츠렸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 뿐이겠는가. 또한 새로운 싹이 무성히 뻗어나서 생기고 변화하며, 생기고 변화하는 것이 동쪽을 터전으로 하여 출발하는 것이다. 더구나 <<詩經>>에 ‘서쪽에서 돌아보았다’는 말을 제시하였고, 석가모니는 ‘처음 동쪽으로 걸어갔다’ 하였으니, 마땅히 동방의 종족이 노력하여 불법에 귀의할 것이다. 이것은 지역이 그렇게 되어 있고 하늘이 마련해 준 것이다.)
東方의 夷는 平易한 것으로 해석하며, 쉽게 교육과 감화를 시켜 어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동쪽의 해뜨는 곳은 大平인데, 그곳 사람은 어질어서 나라가 저절로 태양처럼 상승하고, 달처럼 왕성하며, 雨順風調한 大自然은 모든 생물을 생동, 번성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또 <無染和尙碑銘>에서 東方의 佛者인 無染을, 中國의 高僧인 如滿이 稱頌한 것을 다음과 같이 提示하였다.
“自是 置翰墨 遊歷佛光寺 問道如滿 滿佩江西印 爲香山白尙書 樂天空門友者 而應對 有慙色曰 ‘吾閱人多矣 罕有如是新羅子 他日中國失禪 將問之東夷耶’ 去謁麻谷寶徹和尙 服勤無所擇 人所難己必易 衆目曰 ‘禪門庾異行 徹公賢苦節 嘗一日告之曰 昔吾師馬和尙 訣我曰 春蘤繁 秋實寡 攀道樹者 所悲吒 今授若印 異日徒中 有奇功可封者封之 無使刓’ 復云 ‘東流之說 蓋出鉤讖 則彼日出處 善男子 根殆熟矣 若得東人 可目語者 畎導之 俾惠水丕冒於海隅 爲德非淺 師言在耳 吾喜若徠 今授印焉 俾冠禪侯于東土 往欽哉 則我當年 作江西大兒 後世爲海東大父 其無慙先師矣乎’
<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
(이로부터 筆墨을 버리고 여러 곳을 다니다가 佛光寺에서 如滿에게 道를 물었다. 如滿은 江西의 馬祖에게 心印을 받고, 香山 白尙書 樂天과 空門의 벗이 되는 사람인데, 應對할 때 부끄러운 빛을 띠며 말하기를 ‘내가 사람 겪기를 많이 하였으나, 이 신라 젊은 이와 같은 이는 거의 없었다. 뒷 날에 中國이 禪을 잃으면 장차 東夷에게서 그것을 물어야 할 것인가’ 하였다. 麻谷 寶徹和尙에게 가서 뵙고, 일을 부지런하게 하여 가리는 것이 없으며, 사람들이 어려워 하는 일을 자기는 반드시 쉽게 하니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禪門의 庾黔婁와 같은 異行이다’ 라고 하였다. 徹公이 苦節을 어질게 여겨, 하루는 말하기를 ‘옛날 나의 스승이신 馬和尙께서 나에게 유언하기를, 봄 꽃이 번성하고 가을의 열매가 적은 것은 보리수를 오르는 사람이 슬퍼하고 탄식하는 바이다. 이제 너에게 心印을 줄 것이니, 뒷 날에 배우는 무리들 가운데 奇異한 공이 있어 기를만한 사람이 있거든 길러서 끊이지 않도록 하라 하였으며, 다시 이르기를 불법이 동쪽으로 흐른다는 말은 豫言에서 나왔다. 저 해뜨는 곳 善男子의 根性이 거의 무르익엇을 것이니, 네가 만약 동방 사람으로서 눈으로 말할 만한 사람을 얻거든 잘 지도하라. 지혜의 물로 바다 건너 구석진 곳에서 크게 뒤덮이도록 하면, 공덕 됨이 얕지는 않을 것이다. 고 하였는데, 스승의 마씀이 귀에 쟁쟁하여, 나는 네가 온 것을 기뻐하노라 이제 心印을 주어 동토에서 禪侯로 으뜸가게 하노니, 앞으로 조심한다면, 나는 지금엔 江西 馬祖의 대아이나, 후세엔 海東의 大父가 될 것이므로 先師에게 부끄러울 것은 없으리라’ 하였다.)
중국 洛陽에 있는 佛光寺의 高僧 如滿은 江西 馬祖에게 心印을 받고, 香山 白尙書 樂天의 佛門의 벗이 된 사람인데도 대사와 應對할 때, 부끄러운 기색을 띨 정도로 大師의 佛道가 높았고, 또 如滿은 평생 동안 수많은 佛者들을 겪어 보았지만, 이 新羅 사람인 대사 같은 이를 보지 못했다고 했으며, 뒷 날에 中國에서 禪을 잃어버렸을 때는 그것을 東方의 나라 東夷인 新羅에서 다시 물어야 할 것이라고 豫言하였다.
麻谷寺의 寶徹和尙에게 가서 배울 때, 여러 사람들이 눈여겨 보며 ‘禪門에서의 庾黔婁와 같은 남다른 行實이다’란 칭송과 함께, 寶徹和尙도 ‘大法이 동으로 흐른다는 말은 豫言에서 나왔다. 저 해뜨는 곳 善男子의 根性이 거의 무르익었을 것이니, 네가 만약 東方 사람으로서 눈으로 말할 만한 사람을 얻거든 잘 지도하라. 知慧의 물로 바다 건너 구석진 新羅에 크게 뒤덮이도록 하면 功德됨이 얕지 않으리라’ 한 자기 스승 馬和尙의 말을 인용하며, ‘스승의 말이 귀에 쟁쟁하여 나는 네가 온 것을 기뻐하노라. 이제 心印을 주어 東土에서 禪侯로 으뜸가게 하노니, 후세에 선사에게 부끄럼 없는 海東의 대부가 되어라’ 하였다.
이처럼 대사는 東方 新羅에 태어나, 중국의 高僧 大德인 여러 禪師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고 찬양하였다.
佛法 東流之說은 禪宗의 六祖인 慧能(638-713)의 豫言인데, 宋僧 道源이 지은 [景德傳燈錄] 慧能傳에 잘 기록되어 있다. 慧能이 76세로 入寂하기 전에 두 가지 豫言을 남겼는데, 그 하나는 死後 5,6년을 지나 ‘滿’이라는 이름을 지닌 사나이가 자기의 頭骨을 훔쳐 가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뒤 70년이 지나, 東方에서 두 보살이 와서 자기의 法統을 이으리라는 것이었다. 馬和尙의 東流之說이란 두 번째의 豫言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예언은 비록 慧能이 말한 時期와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佛敎人들이 적중하다고 믿는다.
‘慧能大師 七月八日 忽謂門人曰 吾滅後 五六年 當有一人 來取吾首 --- ’ 又云 ‘吾去七十年 有二菩薩 從東方來 一出家 一在家 同時興化 建立吾宗 締緝伽藍 昌隆法嗣’ [六祖壇經, 付囑品]
먼저 頭骨을 훔쳐 간다는 豫言대로 지금의 河東 雙溪寺 六祖頂相塔에 그의 頭骨이 奉安되어 있다. [祖堂集] 卷18, 仰山和尙條에 보면 金大悲라는 渡唐 遊學僧은 六祖慧能을 매우 羨仰하여 그의 肉身을 新羅에 모시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722년에 洪州 開元寺에서 力士 張淨滿에게 돈 이천냥을 주고 曹溪寺 六祖塔에서 六祖大師의 頭骨을 훔쳐 내게 한 뒤, 모시고 歸國하여 雙溪寺의 六祖頂相塔에 安置하였다. 이것이 所謂 六祖頂相塔의 由來이다. 그러나 傳燈錄에는 未遂에 그쳤다고 되어 있어 確言하기 어렵다.
東方에서 두 보살이 와서 자기의 法統을 이으리라는 것은 無染(800-888)과 梵日(810-889)이 그의 法統을 이었기 때문이다.
東方 新羅 사람이 中國에 가서 佛法을 배워 중국 사람을 능가했다는 말은 다음 글에도 나타난다.
‘門弟子 名可名者 厪二千人 --- 曰僧亮 曰普愼 曰詢乂 曰僧光 ---實可謂 馬祖毓龍子 東海掩西河焉’
(門弟子로 이름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이천 명인데 --- 僧亮 普愼 詢乂 心光이다 --- 實로 馬祖道一이 龍의 새끼를 길러서 新羅[東海]가 中國[西河]를 덮었다고 할만하다.)
‘自玆吾土一變至於魯 八世之後 大師西學而東 化加一變至於道 則莫之與京 捨我謂誰위의재’
(이로부터 우리나라가 일변하여 노나라처럼 되었고, 팔세 뒤로 대사가 중국에서 배우고 돌아와 교화하여 더욱 일변함으로써 도에 이르게 되었으니, 더 크기를 비교할 데가 없음인데, 우리를 버리고 누구를 일컫는 것인가 위대하도다.)
다음 無染和尙碑銘에 나타난 것을 살펴본다.
道常得佛眞 떳떳한 道와 참된 佛을 얻은 이는
海東金上人 우리 신라의 金上人 그분이라
心珠瑩麻谷 마음의 구슬은 마곡에게 통했고
目鏡燭桃野 눈속의 거울은 신라를 비추었네
仁方示方便 우리 동방에 방편을 보이시고
聖住强住持 성주사에 힘써서 주지하셨다네
鷄峯待彌勒 계봉에서 기다리는 미륵 부처는
長在東鷄林 길이길이 동방의 계림에 계시기를
위와 같이 碑銘 中에서도 海東 桃野 東方 仁方 鷄林 등 新羅를 讚揚하는 구절이 많이 보인다.
(2) 眞鑑和尙碑銘
다음 眞鑑禪師碑銘에 나타난 東方 思想을 살펴 본다. 眞鑑禪師는 貞元 20년(804) 入唐, 滄州에 이르러 神鑑大師를 만났는데, 그 때 僧徒 가운데서 서로 이르기를
‘東方聖人 於此復見’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뵙는구나)
하였다. 前에 東方의 道義禪師를 뵈왔고, 지금 또 眞鑑禪師를 뵙게 되었다는 뜻이다. 禪師는 元和 5년(810) 崇山 少林寺의 琉璃壇에서 具足戒를 받고, 道義와도 만났으며, ‘苦行과 배우기를 끝내어 비록 空을 諦觀한다 하더라도 자기의 根本을 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했으며, 그래서 太和 4년 (830) 귀국하니 ‘禪師의 大乘法이 우리의 어진 疆土를 비추게 되었다’. 하였으니, 여기서도 우리 仁方 곧 東方 사상을 엿볼 수 있고, 또 ‘故國인 根本을 잊을 수 없다’ 는 데서는 중국이 아무리 큰 나라이고 불법이 앞섰다 하더라도 新羅만은 못하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興德大王을 만났을 때 왕이
‘寡人行當 以東鷄林之域 成吉祥之宅也’
(과인은 장차 동방 계림의 지역을 길상의 집으로 만드리라)
이라 한 말이라던가, 玉泉寺를 짓고 거기에 머물 때, 中國에 遊學했던 사람들이 찾아와 머물게 되면,
‘謂遠公東林 移歸海表 蓮花世界 非凡想可擬 壺中別有天地則信也’
(혜원선사의 동림사를 바다 건너로 옮겨 왔도다. 연화세계야 범상으로 비겨 볼 바 아니로되, 호중의 별천지임에는 의심이 없다.)
한 것이라던가, 碑銘中에서
猛探虎窟 용감하게 범의 굴을 찾아서
遠泛鯨波 멀리 험한 파도를 넘었으며
去傳秘印 중국에서 비인을 전해 받고
來化斯羅 돌아와서 신라를 교화 하였네
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3) 大崇福寺碑銘
‘矧乃 玉毫光所獨照 金口偈所流傳 靡私於西土生靈 爰及於東方世界 則我太平勝地也 性玆柔順 氣合發生 山林多靜黙之徒 以仁會友 江海協朝宗之勢 從善如流 故激揚君子之風 薰漬梵王之道 猶若泥從璽 金在鎔 而得君臣鏡志於三歸 士庶翹誠於六度 至乃國城無惜 能令塔廟相望 雖在瞻部洲海邊 寧慚都史多天上 衆妙之妙 何名可名 金城之离 日觀之麓 有伽藍號崇福寺者’
(하물며 옥호의 빛이 비치고, 金口에서 偈陀가 흘러 퍼지는 것이, 西域의 生靈에게 한하지 않아 이에 東方 世界에도 미쳤으니, 우리 太平 勝地는 사람의 성질이 매우 유순하고, 地氣가 만물을 생기게 하는데 합당하다. 산과 숲에는 말없이 고요하게 수도하는 무리들이 많아 인으로써 벗을 모으고, 강과 바다의 물은 더 큰 곳으로 흐르고자 하는 것을 좇아, 착함을 따르는 것이 물흐르는 것 같았다. 이런 까닭에 君子의 풍도를 드날리고, 부처의 도에 감화되어 젖는 것이, 마치 붉은 진흙이 옥새를 따르고 쇠가 용광로 안에 들어 있는 것과 같아서 군신이 三歸에 뜻을 비추고, 士庶가 六度에 정성을 기울였으며, 더 나아가 國都에 까지 아낌 없이 塔婆가 즐비하도록 하였으니, 비록 그것이 瞻部洲의 바닷가에 있으나, 어찌 두솔타의 하늘 위에 부끄러울 것인가. 뭇 미묘한 것 가운데 미묘한 것을 무슨 말로써 표현하랴. 金城의 남쪽 해돋이를 볼 수 있는 산 기슭에 崇福寺라는 절이 있다.)
라고 하여, 玉毫의 빛과 金口의 偈陀가 우리 東方 世界에도 미쳤는데, 우리 東方 太平勝地는 지기가 만물을 생성하게 하는데 적합하고, 사람들은 성질이 매우 유순하므로, 많은 修道하는 무리들이 仁으로써 벗을 모아 祖宗의 가르침을 따라 착하게 살며, 君子의 風度를 드날리고 부쳐의 道에 감화되어, 兜率陀의 하늘에 부끄럽지 않다 하였다.
그리고 同 碑銘에서도 다음과 같이 讚頌하였다.
迦衛慈王 迦毗羅衛의 부처님은
嵎夷太陽 해돋는 곳의 태양이시라
現于西土 서토에서 나타 나시어
出自東方 우리 동방에서 돋으셨네
保我子孫 우리들의 자손을 보호하시고
爲民父母 백성들의 부모가 되옵시니
根深桃野 뿌리는 桃野에 깊이 내렸고
波遠桑浦 갈래는 동해에 멀리 뻗었도다
花媚春巖 봄동산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고
月高秋夜 가을 달 벌판에 높이 떴으니
雖居海外 비록 해외에서 살고 있지만
獨秀天下 온 천하에 우뚝이 빼어났다네
(4) 智證和尙碑銘
‘五常分位 配東方者曰仁 三敎立名 現淨域者曰佛 仁心則佛 佛目能仁 則也 導郁夷柔順性源 達迦衛慈悲敎海 寔猶石投水雨聚沙然 矧東諸侯之外守者莫我大也 而地靈旣好生爲本 風俗亦交讓爲先 熙熙太平之春 隱隱上古之化 加以性參釋種 遍頭居寐錦之尊 語襲梵音 彈舌足多羅之字 寔迺天彰西顧 海仁東流 宜君子之鄕 染法王之道 日深又日深矣’
(五常을 다섯 방위로 나누어 東方에 해당하는 것을 仁이라 하고, 三敎가 명호를 세워 淨域에 나타난 것을 佛이하고 한다. 인심이 곧 부처이니 佛目이 인함은 당연하다. 해돋는 곳의 柔順한 性源을 인도하여 迦毗羅衛의 자비로운 敎海에 이르도록 하니, 이는 돌을 물에 던지는 것 같고, 비가 모래를 모으는 듯 하였다.
하물며 동쪽 諸侯로서 外方을 지키는 것으로는 우리처럼 큰 나라가 없으며, 땅이 신령스러워 이미 好生으로 근본을 삼았고, 풍속 또한 서로 사양함으로 先務를 삼았으니, 화락한 태평의 봄이요 은은한 上古의 교화로다. 더욱이 성품은 석가의 종족에 참여하여 遍頭로서 寐錦의 존귀함에 거하고, 언어는 梵音에 비슷하여 혀를 굴리면 多羅의 글자에 족했다. 이는 곳 하늘이 환하게 서쪽을 돌아보고 海印이 동쪽으로 흐르게 된 것이니, 의당 君子의 고장에 부처의 道가 나날이 깊어 지고 날로 깊어질 것이다.)
역시 東方은 仁이요, 仁은 곧 佛이며 佛은 能仁이다. 해돋는 곳 郁夷의 柔順한 性源을 引導하여 迦毗羅衛의 敎海에 이르도록 하니, 너무나 쉽게 敎化한 것이다. 外方을 지키는 나라 중에는 우리 東方 처럼 위대하고 훌륭한 나라가 없으며, 山川이 秀麗하여 好生오로 근본을 삼고 互讓으로 先務를 삼았다.
그러므로 和樂한 태평의 봄이요, 隱隱한 上古의 敎化를 받아, 모든 사람이 석가의 종족에 참여하여, 가장 尊貴한 왕까지도 削髮하고 승려가 되었다. 언어와 문자가 梵音과 서로 통하여 海印 동방으로 흐르게 된 것이니, 君子들이 사는 이 곳에 法王의 도가 나날이 깊어지고, 또 깊어질 것이라 하였다.
2) 儒佛 同歸論
湖南僧 蓮潭 有一은 <四山碑銘序>에서 三敎 思想과 孤雲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昔者 三聖人 並作於姬周之世 雖設敎各異 而同歸于大道則一也 三敎後學 類皆各安所習 阿其所好 指馬之爭 玄黃之戰 窮塵不已 余未嘗不仰屋而歎 洎乎讀孤雲先生所爲文 稽首颺言曰 天生我先生 統貫三敎 大哉 蔑以加矣 已傳有之 金鐸振武 木鐸振文 先生其三敎之木鐸與 然 先生旣冠儒冠 服儒服 則必以儒敎爲前茅 由其文于以憲章孔孟也 自高麗從祀文廟 良以此也’
(옛적에 세 聖人께서 姬氏의 周나라 때에 같이 나셨는데, 비록 가르침을 베품은 각각 다르나 大道에 돌아가는 것은 한가지였다. 그런데 三敎의 後學들은 다 각각 익힌 것만을 좋게 여기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만 의지하여 指馬의 다툼과 세력의 싸움이 끝까지 그치지 않았다.
내가 늘 지붕을 쳐다보며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孤雲 선생이 지은 글을 읽고서는 머리를 조아리고 소리 높여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 선생을 내시어 三敎를 貫通하게 하셨으니, 위대하여 더할 것이 없도다. 이미 옛 기록에 있거니와 金鐸은 武를 떨치고 木鐸은 文을 떨친다고하였으니, 아마도 선생께서는 그 三敎의 木鐸이시리라’ 고 하였다.
그러나 선생께서 이미 儒冠을 쓰시고 儒服을 입으셨으니, 반드시 儒敎로 前茅를 삼고, 글을 통해 孔孟을 본받아 밝혔을 것이다. 高麗 때부터 文廟에 從祀한 것이 진실로 이런 까닭이다.)
이 三敎 思想은 신라의 기본 바탕이 되었던 사상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孤雲 선생 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든 지식인들이 공통으로 생각하고 간직했던 것이다. 朝鮮 時代나 현대처럼 종교가 완전히 分離되어 각각 독자적인 길을 걷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위의 序文에서도 지적했듯이 三敎가 다 大道에 돌아 가는 것은 결국 한가지인데, 자기가 믿고 좋아하는 것만 옳다고 내세워서, 상대의 사상을 비난하고 無視하기까지 하다보니까, 서로 疾視하며 다투는 것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孤雲 선생의 三敎 思想이 유명한 鸞郞碑序에 나타나 있는 것은 周知의 사실이며, 또 四山碑銘 속에는 이와 같은 사상이 담겨져 있는 곳이 매우 많아, 하나하나 다 枚擧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선 鸞郞碑序를 引用하여 본다.
‘崔致遠 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崔致遠의 鸞郞碑序에 이르기를 나라에 玄妙한 道가 있는데, 이를 風流라고 한다. 가르침을 세운 근원은 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실은 곧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서, 모든 衆生을 접하여 敎化한다. 가령,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魯司寇의 主旨와 같고, 함이 없는 일에 처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周柱史의 宗旨와 같고,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竺乾太子의 교화와 같다.)
다음에는 碑銘에 나타난 儒佛 同歸 사상이 나타난 것을 간추려 본다.
(1) 無染和尙碑銘
‘曁憲安王嗣位 賜書乞言 大師答曰 周禮對魯公之語 有旨哉 著在禮經 請銘座側’
(憲安王께서 王位를 이어 받음에, 글을 내려 말씀을 구하니, 大師가 답하기를, ‘周禮에 魯公에게 대답한 말이 깊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禮經에 실려 있으니, 청컨대 자리 곁에 두십시오’ 하였다.)
이 말은 朗慧和尙 碑銘에 있는 것인데, 憲安王(857-860)이 왕위에 오른 뒤, 敎書를 내려 求言한데 대해 大師가 답한 내용이, 儒家 經典인 周禮나 禮經(禮記) 에 있는 말을 들어 左右銘으로 삼으라고 했었던 것이다. 佛經에 있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목을 끈다.
禮經에 있다는 周禮의 魯公에게 대답한 말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의문인데, 孤雲集에 있는 本文 註에는 다음과 같이 論語의 孔子가 魯 哀公에게 답한 것으로 되어 있다.
<魯哀公 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 [論語 爲政 19] 又定公問 一言而可以興邦 有諸 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爲君難 爲臣不易 如知爲君之難也 不幾乎一言而興邦乎 曰一言而喪邦 有諸 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予違也 如其善而莫之違也 不亦善乎 如不善而莫之違也 不幾乎一言而喪邦乎 [論語 子路 15]>
또 朗慧和尙이 임금을 만나 여러 가지를 가르쳐 깨우쳐 주니, 왕은 크게 기뻐하고, 大師를 보게 된 것이 늦음을 한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런데 이 말 또한 孟子에 있는 것이다.
‘恭已南面 司南南宗 舜何人哉 余何人也’
(말씀하시기를 ‘몸을 공손히 하고 南面한 사람에게 南宗을 가르쳐 이끌어 주시니, 순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라고 하였다.)
獻康王이 喪主로 있으면서 大師에게 가르침을 청할 때 한 말이나, 대사의 답 亦是 마찬가지이다.
‘獻康大王 居翼室 泣命王孫 勛榮諭旨曰 孤幼遭悶凶 未能知政 致君奉佛 誧濟海人 與獨善其身不同言也 幸大師無遠適 所居惟所擇’
(헌강대왕이 익실에 거처하게 되어 울면서 왕손 훈영을 통해 대사에게 뜻을 알리시되, ‘孤가 어려서 부왕의 상을 당하여, 정치는 잘 알지 못하지만, 임금께 충성을 다하고 부처를 받들어, 크게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자 꾀하는 것과, 자기 한 몸만을 바르게 하는 것은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대사께서는 국사의 적당한 지위를 멀리하시지만 마시고, 계실 곳을 택하시기를 바랍니다.)
‘對曰 古之師則 六籍存 今之輔則 三卿在 老山僧何爲者 坐蝗蠹桂玉哉 就有三言 庸可留獻 曰能官人’
(대답하기를 옛 스승으로는 六籍이 있고, 오늘의 輔臣으로는 三卿이 있습니다. 늙은 山僧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앉아서 누리처럼 땔나무와 쌀을 좀먹겠습니까. 다만 세 글자로써 드릴 말씀이 있으니 ‘能官人’ 그것입니다.)
왕이 翼室에 居하면서 喪主의 도리를 다하는 것과 六經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 能官人 등 대사의 말은 모두 儒家 사상이다. ‘能官人’ 이 말 속에는 관리의 등용이 骨品 체제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던 당시의 폐단을 비판하는 간접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다음에 이와 관련된 部分을 대강 간추려 들어 본다.
‘乾符帝錫命之歲 令國內舌杪 有可道者 貢興利除害策 別用蠻牋書言 荷天寵有所自因 垂益國之問 大師引出 何尙之 獻替宋文帝 心聲爲對 太傅王覽 謂介弟南宮相曰 三畏比三歸 五常均五戒 能踐王道 是符佛心 大師之言 至矣哉 吾與汝宜惓惓’
(乾符帝가 錫命하던 해(878), 임금(獻康王)께서는 나라 안의 진언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興利除害’의 방책을 바치도록 하시되, 각별히 우리나라의 종이를 사용하여 말을 글로 적게 하시니, 하늘의 총애를 받음은 저절로 그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나라에 보탬이 되는 질문을 내리신데 대하여, 대사는 何尙之가 宋의 文帝에게, 좋은 일을 하도록 권하고 나쁜 일을 하지 않도록 간하던 말을 꺼내어 대답하였다. 太傅王께서 그 말을 받으시고, 아우이신 禮部令 南宮相에게 일러 말씀 하시기를, ‘三畏는 三歸와 비길 만하고, 五常은 五戒와 알맞게 어울리느니라. 王道를 실천하는 일이 佛心에 부합되는 것이니, 대사의 말슴이 지극하도다. 나와 네가 성의를 다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上甚悅擡拜曰 昔文考爲捨瑟之賢 今寡人忝避席之子 繼體得崆峒之請 服膺開混沌之源 則彼渭濱老翁 眞釣名者 圮上孺子 盖履跡焉 雖爲王者師 徒弄三寸舌也 曷若吾師 語密傳一片心乎 奉以周旋 不敢失墜’
(임금이 매우 즐거워 하여 두손 모아 절하며 말하기를 ‘지난날 선고께서는 曾點과 같은 賢人이 되었는데, 지금의 寡人은 욕되게도曾參과 같은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자리를 이어 받아 有德者에게 至道를 얻고, 그것을 받들어 간직함으로서 뒤엉켜진 근본을 개발하였는데, 저 渭水 가의 姜太公은 참으로 名譽를 낚으려는 사람이었으며, 흙 다리 위의 張良도 대개 그러한 자취를 밟았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임금된 자의 스승이 되었어도 한갖 세치의 혀만 놀린 것이니, 어찌 나의 스승께서 미묘한 말씀으로 일편심을 전한 것과 같겠습니까. 받들어 따를 것이며, 감히 실추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大師性恭謹 語不傷和氣 禮所云 中退然 言吶吶然者乎’
(대사는 성품이 공손하면서 말을 삼가 좋은 분위기를 해치지 않도록 하엿다. 禮記에 이르듯이 ‘몸은 겸손하고, 말은 나즉하며 느린 사람이라’ 하겠다.)
고 하여, 性品이 謙遜하고 말은 愼重히 하므로, 禮記에서 말하는 儒家의 수양된 선비와 같은 이임을 나타내었다.
‘且曰 山爲我爲塵 我安得安身 其克己勵物皆是類 大師少讀儒家書 餘味在脣吻 故酬對多韻語’
(또 말하기를 ‘산이 나를 위해 더럽혀졌는데, 어찌 내가 몸을 편안히 하겠는가.’ 하였으니, 그 자기 몸을 다스리고 일에 힘씀이 모두 이와 같다. 대사가 젊었을 때 儒家의 서적을 읽어 남은 맛이 입술에 익었으므로, 酬酌하고 상대할 때 韻語를 만이 썼던 것이다.)
라고 하여 천성이 부지런하고 소박하며, 젊었을 때는 儒家 經典을 많이 일거 儒敎 思想도 환히 이해하고 있음을 暗示하였다. 韻語를 많이 썼다는 것은 ‘山爲我爲塵 我安得安身’에서 塵과 身(眞韻;平聲)같은 韻字를 글에 많이 사용한 것으로, 韻文인 詩에도 능함을 할 수 있다.
銘에서도 ‘觀光堯日下’라 하여, [周易 觀卦]의 ‘觀光之國 利用賓于王’의 구절을 援用하였고, ‘我非待三顧’라 하여, 諸葛亮의 出師表에 있는 三顧草廬의 고사를 引用하였고, 巢父 許由의 故事와 함께 ‘甲仁復冑義’라 하여 仁과 義를 갑옷과 투구같이 여겨야 한다고 하는 등, 儒家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2) 眞鑑和尙碑銘
同 碑銘의 序文 첫머리에서
‘夫道不遠人 人無異國 是以東人之子 爲釋爲儒’
(대개 道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른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佛法을 배워 佛者가 되기도 하고, 儒學을 배워 儒者가 되기도 한다.)
하여, 道라는 것은 사람과 멀지 않으며, 나라가 다르다고 하여 사람이 다른 것이 아님을 말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佛者나 儒者가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이 論하였다.
‘遂得慧炬則光融五乘 嘉肴則味飫六籍 競使千門入善 能令一國興仁 而學者或謂身毒 與闕里之說敎也 分流異體 圓鑿方枘 互相矛盾 守滯一隅 嘗試論之 說詩者不以文害辭 不以辭害志 禮所謂 言豈一端已而 夫各有所當 故廬峰慧遠著論 謂如來之與周孔 發致雖殊 所歸一揆 體極不能兼者 物不能兼受故也 沈約有云 孔發其端 釋窮其致 眞可謂識其大者 始可與言至道矣’
(마침내 智慧의 횃불을 얻어 빛이 五乘에 밝았고, 先儒들의 아름다운 반찬으로 六經을 배불릴 수 있었다. 다투어 많은 사람들을 善에 들어가도록 하였고, 한 나라가 仁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학자들이 혹 말하기를 ‘釋迦와 孔子가 說敎한 것은 흐름과 체재가 나뉘고 달라,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과 같고, 서로 矛盾되어 한 귀퉁이 만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자세히 살펴 보면, ‘詩를 해설하는 사람은 글자(文)로서 말(辭)을 해치지 않고, 말로써 뜻(志)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禮記]에 ‘말이 어찌 한 갈래 뿐이겠는가. 무릇 제각기 경우에 적당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廬山의 慧遠이 論하기를 ‘如來가 孔子와 비록 이치를 발명함은 달리 하나, 歸着하는 것은 한 가지이다. 지극한 이치를 體得함에 있어서, 아울러 應하지 못하는 것은 만물을 똑 같이 아울러 받아 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고 하였다.
沈約은 말하기를 ‘孔子는 그 실마리를 일으켰고, 釋迦는 그 이치를 밝혔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 大要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至善의 道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大師는 慧遠에게서 佛法을 배웠지만, 儒家 經典인 六經도 함께 공부하여 사람들을 善으로 이끌고, 나라를 仁으로 興하게 하였다 했으며, 어떤 사람들이 ‘釋迦와 孔子의 說敎가 서로 矛盾 된다’고 한데 대해, [禮記]에 있는 것을 인용하여 같은 뜻이라도 말의 표현이 다를 수 있다고 反駁하였다.
그리고 또 慧遠의 主張인 ‘釋迦와 孔子가 비록 理致를 發明함은 달리 하지만 歸着하는 바는 한 가지이며, 極致를 體得함에 있어서 아울러 응하지 못한다’는 말은 引用하여, 儒佛同歸를 論하고, 또 ‘孔子는 그 실마리를 일으켰고, 釋迦는 그 이치를 밝혔다’고 한 沈約의 말에 대해, 沈約을 ‘大要를 알고 至道를 論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極讚하였다.
또 儒佛을 譬喩하여 다음과 같이 論하였다.
‘昔尼父 謂門弟子曰 予欲無言 天何言哉 則彼淨名之黙對文殊 善逝之密傳迦葉 不勞鼓舌 能叶印心 言天不言 捨此亥適 而得遠傳妙道 廣耀吾鄕 亦豈異人哉 禪師是也’
(옛날 孔子가 門弟子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말하지 않으련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고 하였다. 이것은 곧 저 維摩居士가 沈黙으로써 文殊菩薩을 대한 것이나, 釋迦가 迦葉尊者에게 善逝를 隱密히 傳한 것과 같이, 혀끝도 움직이지 않고 마음을 전할 수 있었는 것과 같다. 하늘이 말을 하지 않는다 함은 이를 두고 어디에 가서 얻을 것인가. 멀리서 현묘한 도를 전하여 우리나라를 빛낸 이가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바로 禪師 이 분이시다.)
(3) 大崇福寺碑銘
다음 大崇福寺碑銘에서도 이와 같은 사상이 나타난 곳이 많다. 다음에 몇 가지 例를 든다.
‘王者之基祖德 而峻孫謀也 政以仁爲本 禮以孝爲先 仁以推濟衆之誠 孝以擧尊親之典 莫不體無偏於夏範 遵不匱於周詩 聿修芟秕稗之譏 克祀潔蘋蘩之薦 俾惠渥均濡於庶彙 德馨高達於穹旻’
(王者가 祖上의 德을 기본으로 하여 後孫에게 대한 計策을 세움에 있어서, 정치는 仁으로서 근본을 삼고, 禮敎는 孝로서 優先을 삼아야 한다. 仁으로 大衆을 救濟하려는 정성을 보이고, 孝로서 어버이를 높이는 典禮를 擧行하며, 洪範에서 치우침이 없는 것을 體得하고, 孝子가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周詩를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조상의 德을 이어받아 닦음에 있어서 실속이 없다는 비난을 제거하고, 祖上의 祭祀를 잘 받듦에 있어서 蘋蘩과 같은 조촐한 祭需를 淨潔히 올림으로써 두터운 은혜가 백성에게 고루 미치게 하며, 끝없는 덕의 향기가 높은 하늘에 사무치도록 한다.)
儒家의 基本 思想인 仁의 정치와 孝를 말하고, 나아가 書傳 洪範과 詩傳 大雅에 있는 것들을 引用하여 政治의 原理를 論하였다. 그리고, 조상에게 祭祀 지내는 儒家의 중요한 사상도 나타나 있다.
景文王의 業績을 讚揚함에 있어서도 다음과 같이 周易과 周禮에 있는 儒家의 말들을 인용하였다.
‘先大王 --- 據龍田而種德 栖鳳沼而沃心 發言則仁者安人 謀政乃導之以道 八柄之重權咸擧 四維之墜緖斯張 歷試諸難 利有攸往’
(先大王께서는 --- 임금이 될 자리에 있으면서 덕을 심으시고, 闕內에 사시면서 마음을 윤택하게 하시었다. 말씀을 하시면 곧 어진이가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이 되었고, 정치를 함에 있어서 道로써 引導하시었다. 여덟 가지 중요한 權柄을 모두 擧行하시고, 네 벼리의 실추된 실마리를 펼치셔서 모든 난관을 겪었지만 이로움으로 향하는 바가 있었다.)
(4) 智證和尙碑銘
앞 절 東方思想 智證大師碑銘 條에서 同 碑序文의 첫 머리에, ‘五常의 仁이 東方이요 東方은 仁心이며, 仁心은 곧 佛 能仁이다’ 라고 한, 儒佛 同歸에 대한 것을 이미 例示하였었다.
大師의 隱遁한 行蹟을 讚揚하는데 있어서, 亦是 儒家 사상인 周易과 中庸의 句節을 다음과 같이 끌어다가 비유하였다.
‘罷思東海東 終遁北山北 豈大易之无悶 中庸之不悔者耶’
(동해의 동쪽에 갈 생각을 그만 두고, 마침내 북산의 북쪽에 은둔하였으니, 어찌 周易에서 말한 ‘세상을 피해 살아도 근심이 없다’는 것과 중용에서 말한 ‘세상에서 알아 주지 않더라도 후회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太師에 追贈된 景文王은 鼎敎<三敎>에 融會한 사람이라 했고, 王이 大師를 만나 보고자 하여 보낸 書信에서도
‘伊尹大通 宋纖小見 以儒譬釋 自邇陟遠 甸邑巖居 頗有佳所 木可擇矣 無惜鳳儀’
(伊尹은 나아가는데 거리낌이 없었고, 송섬은 물러나 앉아 드러내지도 않았습니다. 佛로써 儒를 譬喩하자면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王都 주위의 巖居에도 매우 아름다운 곳이 있어서, 새가 가려서 앉을 만한 나무가 있으니, 鳳凰의 來儀를 아끼지 마십시오.)
라고 하여, 儒者들의 行蹟을 例를 들어 大師가 서울인 慶州 가까이에 머물면서 임금 자신을 가르쳐 주고, 도와 주기를 청하였다.
伊尹은 殷의 賢人으로 이름은 摯. 처음 莘野에서 밭을 갈았으나, 湯王을 만나 阿衡이 되었다. <<孟子>>에 ‘伊尹은,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백성이 아니랴. 하고, 다스려 져도 나갔으며 혼란해 져도 나갔다. 또 말하기를 하늘이 백성들을 낼 적에 先知者에게 後知者를 일깨워 주도록 하고, 先覺者에게 後覺者를 일깨워 주게 하였다. 나는 하늘이 낸 백성 중에서 先覺者이다. 나는 이 道를 가지고 이 백성을 일깨워 주려고 한다.’ 고 하였다.
宋纖은 晉나라 사람으로 字는 令艾 젊어서부터 遠志가 있어서 세상과 어울리지 않고, 酒泉의 南山에 은거하며 修學하였는데, 그를 찾아와 배은 사람이 三千名이나 되었다. 州郡에서는 누차 불럿지만 끝내 불응하여, 太守였던 馬岌은 ‘名可望而身不可見 德可仰而形不可覩’라고 아쉬워 하였으며, 또 楊宣은 頌을 지어 ‘爲枕何石 爲漱何流 身不可見 名可究’라고 하였다 한다.
끝으로 同 碑銘중에 儒佛 사상이 나타난 것을 다음에 例示한다.
麟聖依仁乃據德 공자는 인에 의지 덕에 의거 하였으며
鹿仙知白能守黑 노자는 백을 알면서도 흑을 지키었네
二敎從稱天下式 두 교만이 천하의 법식으로 일컬으니
螺髻眞人難砽力 석가의 가르침은 힘겨루기 어려웠네
十萬里外鏡西域 십만리 밖 서역의 거울이 되었었고
一千年後燭東國 일천년 후 동국의 등불이 되었다네
4 맺는말
四山碑銘은 孤雲 선생의 三敎 사상을 基本으로 하여 지은 우리나라 最古 最大의 傑作이다. 우리나라 金石學의 寶典으로 대단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文獻的으로도 三國史記나 三國遺事보다 훨씬 앞서는 귀중한 자료이다. 儒敎, 佛敎, 道敎의 종교 사상은 물론, 哲學 歷史 政治 敎育 文學 사회 등 多方面에 있어서의 硏究 資料로서는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할 만하다.
특히 典故를 많이 사용하여 難解한 점이 없지는 않지만, 사용이 적절하여 音調가 잘 맞으며, 짧은 글 속에 많은 의미를 含蓄하고 있어서 妙味를 맛볼 수 있고, 多樣한 知識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湖南僧 蓮潭 有一은 同 碑銘 序에서 다음과 같이 評하였다.
‘今此四碑 撰銘大浮屠行業 內典外書 雜糅成文 而對偶甚妙 引事甚廣 無一字無來歷 其殘膏賸馥 沾丐後人多矣 宜乎桑門之徒 藏去(감출거)而雋永也 --- 韓柳之優於先生固是 先生之此格 韓柳不若也’
(이 네 碑는 大德의 行業을 銘으로 지은 것인데, 內典과 外書를 총 網羅하여 문장을 이루었다. 그 對句로 짝을 지은 것이 매우 微妙하고, 인용한 것이 몹시 넓지만, 한 글자도 내력 없는 것이 없어, 그 遺風과 남은 향기를 후인에게 적셔 줌이 많다. 그러므로 佛門의 學徒들은 영원토록 寶藏해야 할 언론이다. --- 韓愈와 柳宗元이 선생보다 우수함은 是認하겠으나, 선생의 이러한 格調만은 韓 柳도 따르지 못할 것이다.)
佛門의 학도들 뿐만 아니라, 누구나 永遠토록 寶藏하려고 애써야 할 것이고, 韓愈와 柳宗元이 선생보다 文章이 優秀하다는 것은, 옛 사람들의 慕華思想에 의한 것이지, 格調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못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 碑銘에 나타난 선생의 東方思想과 儒佛思想을 대략 살펴 보았다. 이것은 선생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