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楓菴 文緯世 先生生涯文學

 

金時晃 <慶北大 名譽敎授>

 

1. 머리말

 

文緯世 先生의 자는 叔章, 호는 楓菴, 본관은 南平이고, 朝鮮 中宗 甲午年(1534)에 태어나서 全羅南道 長興에 살았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재주가 남들보다 뛰어났다. 일찍이 柳眉巖 선생을 拜謁하고 經義語錄 등 글의 어려운 곳을 물었더니, 眉巖이 아이는 언젠가는 반드시 儒學大家가 될 것이라고 했다.

外從叔橘亭 尹衢退溪拜謁하자, 퇴계가 湖南後進에 대해 물었을 때, 尹橘亭이 공에 대해 말씀드렸고, 이 열세 살 때에 陶山에 가서 퇴계선생께 受學하게 하여, 朱子書에 대해서 묻고 강론을 들었다. 尹剛中 辛乃沃과 함께 鳴玉臺에서 퇴계를 뫼시고 유람할 때에, 퇴계께서 記文을 지으시어 에게 쓰게 하시고, 여러 사람의 이름을 돌에 새기도록 하셨다. 퇴계께서는 李德弘 선생을 시켜서 璇璣玉衡을 만들게 하셨다. 공이 꿇어앉아 물으니까 퇴계께서 이것은 임금이 임금을 도울 때 七政을 다스린 것이다. 孟子의 말에 이 요임금을 섬기는 것으로써 임금을 섬기지 않으면 이것은 임금을 해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군자가 조정에 있으면서 이 도리를 알아야 하고, 伊尹이 농사를 지으면서도 堯舜의 도를 즐긴 것君子가 들에 있을 때에도 이 이치를 알아야만 한다. 그러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하고 말씀하셨다. 理學을 깊이 공부할 때 寒岡과 같은 여러 어진 사람들과 禮說에 대한 어려운 문제들을 의논하면서 서로 높이 받들고 귀하게 여겼다.

丁卯(1567)년에 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外部의 여러 생각을 끊고 楓山에 집을 지어 弟子들을 거느리고 經學을 토론했다. 그 후 柳眉巖湖南 巡察使가 되어서 선비 다섯 사람을 추천했는데, 공도 그 중의 하나이었다.

壬辰倭亂 때는 다섯 아들과 조카 한사람과 집의 종 등 수백 명을 거느리고 倡義하여 의 명성을 크게 떨쳤으며, 嶺南 湖南이 힘을 입어 편안했다. 權慄 將軍湖南 義兵功勞狀啓를 임금께 올릴 때 공을 제일 첫머리에 올려, 龍潭縣令을 배수했다.

丁酉再亂 때도 공은 흩어진 兵卒들을 거두어 적을 막았으므로, 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겨서 坡州牧使除授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예순 일곱 살에 세상을 마쳤으며 原從功臣으로 등록이 되었고, 贈職參判이며 康成書院祭享 되었다.

 

 

2.先生家系生涯

 

1) 家系

 

南平文氏 判書(寧海府使)公派 世界系表에 의하여 선생의 家系를 아래와 같이 提示한다.

 

始祖 文多省 : 字明遠 號三光 諡武成公 --- 倬 諡武列

中祖 1世 翼 : 高麗 文宗朝 登科 諡敬節. 子 公仁 公元 可觀 公裕

2世 公裕 : 睿宗朝 登 閤門祗侯 諡敬靖. 子 克謙 克純 克易

3世 克謙 : 1122-1189. 1158 文科 諡 忠肅. 子 侯軾 惟弼 惟哲

4世 侯軾 : 1137-1177. 閤門祗侯 諡 忠烈. 子 挺 董

5世 挺 : 康宗朝 登 諡忠翼. 子 得俊 得傑

6世 得俊 : 1263 登 諡毅安. 子 克儉

7世 克儉 : 忠宣王朝 登 諡靖烈. 子 允恪 允愼

8世 允恪 : 忠肅王朝登 奉翊大夫. 子 叔宣

9世 叔宣 : 1307-1351 諡忠貞. 子 益謙 益漸 益浮 益夏

10世 益漸 : 1331.2.8. 1360 1400.2.8.卒 諡忠宣 封江城君 封富民侯 配八溪周氏 晉陽鄭氏 子 中庸 中誠 中實 中晉 中啓

11世 中誠 : 13501385登 司諫院 獻納. 子 和 稔 彬

12世 和 : 1368-1448 諡景惠. 子 琰 琓 璞 瑞

13世 琰 : 高麗 禑王朝 登 井邑縣監 子 尙廉 尙能 尙儉 尙德 尙行

14世 尙行 : 朝鮮 太宗 辛卯(1411) 文科及第 諡 敬肅 配 原州元氏 咸陽盧氏 子 穆 蘊 雍

15世 蘊 : 初諱 仲可 太宗朝 登 寧海府使 贈工曹判書 配昌寧曹氏

16世 昌 : 海美縣監 配光山金氏 子 堅 緊 賢

17世 賢 : 吏曹參議 配永川皇甫氏 子 亮

18世 亮 : 工曹參議 配海南尹氏 子 緯天 緯地 緯世

19緯世 : 號 楓菴 子 元凱 亨凱 弘凱 汝凱 括凱

 

 

2) 生涯

 

(1)成長 受學

 

선생은 中宗 29(1534) 911日 亥時 長興郡 夫山坊 春亭村 本第에서 出生하였다. 어릴 때 가정에서 배울 때부터 지극히 誠實하고 恭敬하는 태도로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다했기 때문에 이웃 어른들이 모두 特異한 아이라고 嗟歎하였다.

9세에 外從叔橘亭 尹衢 선생에게 經書史書를 배우는데, 그 뜻을 상세하게 탐구하여 한자 한구절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였으며, 말과 행동이 침착하며 조용하고 얌전하여 마치 老鍊成人이 된 것 같았으므로, 橘亭 선생이 크게 奇異하게 여겨 늘 남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평범하게 볼 사람이 아니고, 반드시 큰 선비가 될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10때에 小學을 가르치니까 배운 대로 行動하면서 글짓기에는 별로 힘쓰지 않았으며, 스스로 마음을 굳게 세워 性理學專念하려는 뜻을 가져, 매일매일 講磨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正心修身을 한결같이 橘亭 선생을 楷範으로 삼았다.

11橘亭 先生宅留學하였는데, 海南으로 眉巖 柳希春 선생의 門下에 나아가, 어려운 經傳의 뜻을 묻고 또 語錄等書를 배우는데 眉巖이 크게 獎勵하며이 아이는 끝내 반드시 大儒學者 가 될 것이라.’고하였다. 14에는 橘亭 선생의 勸誘推薦으로 陶山退溪先生 門下에 나아가게 되었다.

22歲 乙卯(1555)大人 參議公을 당하여 喪制朱文公 家禮에 따라 행하였다.

26陶山에 가서 퇴계선생을 모시고 투호놀이를 하면서 觀德을 하고, 李德弘에게 하여 璇璣玉衡을 만들어 天象을 살피게 하였는데, 楓菴이 나아가 質問을 하니까 退溪네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임금이 임금을 도울 때 七政을 고르게 한 것이다하였다.

그리고 또 退溪孟子伊尹의 말을 들어, 임금을 섬기는 臣下道理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孟子가 말하기를,‘임금을 섬기면서 임금이 임금을 섬기는 도리로 하지 않는다면 그 임금을 해치는 것이다.’ 라고 한 것과 伊尹이 말한 농촌에 살면서도 堯舜의 도리를 즐겨야 한다.’고 한 그 이치를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27때에 溪舍에서 퇴계선생이 諸葛孔明八陣圖에 언급하고, 八陣圖解說書를 내어 보이면서 傳寫하여 別本을 만들게 하고는 이 역시 格物致知一段이니 讀書하는 여가에 유의해서 잘 살펴보라 하였으며, 또 어느날 主客問答 을 내어 보이면서 그대들이 이 學說을 토론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므로, 선생(楓菴) 나아가 이것을 보면 道學門路를 알 수 있는 것입니까하고 물으니 퇴계선생이 그렇다고 하였다.

28性理學을 깊이연구하면서 寒岡 鄭逑 선생과 함께 禮文등의 서적에 대해 토론하며 서로 尊敬하고 높이 평가하였다.

33歲 外從弟 剛中 尹欽中과 함께 溪舍에가서 退溪에게 朱書에 대해 質疑를 하였다. 퇴계는 尹杏堂에게 아래의 를 지어 주었다.

 

朱門博約兩工程 주자문하 박문약례 두 공부 과정은

百聖淵源到此明 모든 聖賢 學問 淵源 여기와서 밝아지네

珍重手書留至敎 珍重한 편지에는 가르침이 지극하여

精微心法發群英 精微心法을 여러 英才 啓發했네

 

嗟余竭力共白頭 나의 힘 다했지만 백두되니 한탄하며

感子收功已汗靑 그대 공부 거두어 학문업적 감탄하네

更遣諸郞詢瞽見 젊은 학자 보내어 나의 견해 물으니

病中深覺負仁情 병중에도 어진 정을 깊이 느끼게 하네

 

出生부터 33까지를 修學期로 보며 이때 까지의 年譜 原典을 아래에 붙여 참고로 삼게 한다.

 

中宗 29(1534) 911日 亥時 長興郡 夫山坊 春亭村에서 出生

7歲 學于家庭 自灑掃至於進退 自親愛及其親友 必極誠敬 不待勸勉而能 隣老見之 莫不嗟異焉

9歲 從舅氏 橘亭 尹衢先生學 凡所受書史 無不細究旨意 旋輒强記 無一遺漏 言語動止 極其安詳靜淑 便若老成底人 橘亭先生 大奇之 常語人曰 此兒 終必爲大儒 不可以凡兒視也

10歲 橘亭先生 授以小學 使之服行 不以詞章勉焉 先生痛自樹立 專意性理之學 日日講磨 孶孶不怠 正心修身 一以橘亭先生爲楷範 且不以進取爲意 然探賾經傳之暇 窮搜百家語 或作爲文 更多逼古作者

11歲 留學于橘亭先生 時眉巖 柳(希春)先生 以舊鄕往來海南 先生累造其門 問難經義 及其語錄等書 眉巖大加獎勵曰 此兒終必爲斯文大儒

13歲 丙午(1546) 退溪先生 問於橘亭曰 湖南有人乎 橘亭薦先生曰 此兒雖未成童 頗有德性然 退溪先生 聞而奇異 欲與一見 橘亭遂勸送于陶山

14歲 留學于陶山

15歲 春 歸覲

18歲 春 聘廣州李氏 參奉 景春女

19歲 春夏之交 與諸人 將出遊前川 忽見春草生庭 流鸎選柳 因微吟

 

映階碧草自春色 섬돌에 비친 푸른 풀 절로 봄빛을 띠고

隔葉黃鸝空好音 잎에 숨은 꾀꼬리 소리 울려퍼지네

 

之句 人曰 此乃杜工部 武侯墓前 感時物而作 今君之微吟 抑有何意思耶 先生曰非也 今窓前春色 亦合乎 周濂溪之自家意思 柳上嬌鸎 亦爲善 變之羽也而 適先於隨柳之樂 故因以吟之

22歲 乙卯(1555) 丁參議公憂 喪制一遵朱文公家禮

26歲 己未(1559) 退溪先生 於玩樂齋 使諸生投壺 以觀其德行 令李德弘 造璇璣玉衡 以察天象 緯世跪而進問 退溪先生顧謂曰 汝知此乎 此舜相堯時 以齊七政者也 孟子曰 事君不以舜之事堯 事君是賊害其君者也 君子在於朝 不可不知此道也 伊尹曰 處於畎畝 樂堯舜之道 君子在於野 不可不知此理也 其可忽諸

27歲 庚申(1560) 在溪舍時 退溪先生 語及諸葛孔明八陣圖 仍出示其圖說 使傳寫別本曰 此亦格致工夫 一端讀書之暇 可以留意究觀也 一日 退溪先生 出示主客問答一帙曰 公等試論此說何如 緯世進曰 觀此足以知道學門路矣 退溪先生曰 然 <諸葛孔明八陣圖 知道學門路>

28歲 辛酉(1561) 潛心理學 與寒岡鄭逑 論難禮文等書 相爲推重

31歲 甲子(1564) 自溪舍 適聞親癠乃還

32歲 乙丑(1565) 隨母舅 杏堂尹() 涖任安東之行 因先往陶山拜謁

33歲 丙寅(1566) 冬與內弟 尹剛中欽中 往拜于溪舍 質問朱書文意 閱月乃還安東 退溪先生 因寄詩于杏堂公曰

 

朱門博約兩工程 주자문하 박문약례 두 공부 과정은

百聖淵源到此明 모든 聖賢 學問 淵源 이에서 분명하네

珍重手書留至敎 珍重한 편지에는 가르침이 지극하여

精微心法發群英 精微心法을 여러 英才 啓發했네

 

嗟余竭力空白頭 나의 힘 다했지만 헛된 백두 한탄하며

感子收功已汗靑 그대 공부 거두어 학문업적 감탄하네

更遣諸郞詢瞽見 젊은 학자 보내어 나의 견해 물으니

病中深覺負仁情 병중에도 어진 정을 깊이 느끼게 하네

 

 

 

又往陶山 陪退溪先生 遊鳴玉臺而 退溪作臺記 命緯世書之 退溪先生 歸謂諸弟子曰 向學之暇日 深得佳趣者 惟文緯世也

 

 

(2)學問과 선비정신

 

선생은 처음부터 名譽利益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學問에만 뜻을 두어, 經書諸子書 史書등을 연구하여 性理學專念하면서 退溪先生敎訓에 따라 兵書 硏究兵法까지도 達通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學問하는 선비로서 부모의 命令希望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므로, 34明宗 22(1567)母夫人 尹氏에 따라 科擧에 나아가면서 탄식하기를,‘古人들이 어버이를 위해 뜻을 굽힌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물며 나에게 親命이 있으니 과거를 할 수 없는 것이다하고 드디어 鄕試에 나아가 壯元을 하였다. 이어서 이해 10司馬試淸溪 柳夢井 從姪 南溪 李洁과 함께 同榜及第하여 나란히 남쪽으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모두 才德을 겸비한 人材를 얻었다고 稱頌하였다.

37歲 庚午(1570) 128<陽曆 辛未(1571) 113> 退溪先生易簀하니 선생이 痛哭하며 泰山이 무너졌으니 앞으로 나는 어디로 갈가까또 말하기를우리의 儒道가 날로 衰弱해질 것이니 나라는 장차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하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말이 어찌 이처럼 極端에 이르는가 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夏殷周 三代가 이어받은 것을 보면 앞으로 十世를 알 수 있다고, 孔子子張에게 말한 예를 들어, 수십년 앞날의 를 예측하며 매우 念慮하였는데, 과연 數十年 내에 그 말이 사실로 나타났다.

38晦賦를 지어 자신의 뜻을 밝히고, 지극한 효성으로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을 바탕으로 삼아 家人子弟들 또한 法度로 가르치니 鄕黨에서 모두 模範을 삼았다.

39母夫人 尹氏 喪을 당하여 한결같이 朱文公家禮에 따랐고, 三年喪을 마친 42에는 永感下의 몸이 되니, 더욱 聞達을 구하지 않았다. 伯氏仲氏汭江 東西에 각각 , 挹淸亭을 지었으며, 선생은 楓山에 자그마한 집을 지어, 三兄弟杖屨相從하면서 門徒 數十人을 이끌고 經學卞正禮學講論하였다. 그리고 花朝月夕을 당해서는 함께 모여 와 술로 和穆하게 서로 즐기므로 고을 사람들이 一門三孝라고 칭송하였다.

43歲 丙子年(1576)眉巖 柳希春 선생이 湖南巡察使가 되어, 湖南五賢을 조정에 薦擧했는데, 선생도 그 중에 한사람이었지만 결국 벼슬 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51고을 북쪽 有恥迦知山 속 깊숙한 골짜기에 샘과 돌이 깨끗하여 老年을 보낼만한 곳이므로, 시냇가에 집을 짓고는 梅花와 대나무를 심었다. 거문고와 책을 左右에 쌓아 두고 그 가운데 조용히 앉아, 孔子 孟子 程子 朱子著書를 읽으면서 조금도 게을리 함이 없었다.

그리고, 퇴계선생이 道學書 上疏文 主客問答 등의 學說 을 손수 베껴 써서, 탐색하고 窮究하며 항상 손에서 놓지 않았으니, 確固意志로써 도를 구하고 實地에 발붙여 遂行함이 이와 같았다.

54에 산꼭대기에 따로 집을 지어 집 이름을 白雲巖이라 하고. 가르치는 여가에 子姪들에게 활쏘기와 말타기를 가르치며 말하기를이것 또한 六藝가운데 하나이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이때 까지의 年譜 原典을 아래에 붙여 참고로 삼게 한다.

 

34歲 丁卯(1567) 初絶意名利 母夫人 尹氏 命赴擧 先生喟然嘆曰 古人爲親屈者 良有以也 況吾有親命 不可廢也 遂赴鄕解居魁 是年十月 中司馬 與同榜 淸溪 柳夢井 從姪 南溪 李洁 幷馬南歸 時人稱其榜爲得人

37歲 庚午(1570) 128<陽 辛未(1571) 113> 退溪先生 易簀 先生 哭之痛曰 泰山將頹 吾將安往 又曰 吾道日衰 國將何賴 人曰 何其言之 至於極也 先生曰 昔孔夫子 答子張曰 殷因於夏 周因於殷 以此推之 雖十世可知也 然則 以今之往 不因後之來乎 自此以後 不出十五年 哲人又委而 又其後數年間 群小得志 賢類被禍 逆臣繼出而 自今至于二十餘年 禍將不測 人笑其言矣 過自退溪先生 卒後十五年甲申 栗谷李先生卒 至于丙戌 朝議大變 世道日壞 牛栗兩先生 亦退被黜 丁亥戊子之間 重峯趙公()諸賢 皆 再次上疏 連繼投竄 厥後己丑 又有汝立之亂而 自庚午至于壬辰則 二十三年也

38歲 辛未(1571) 作晦賦 以見其志 惟孝養偏親 以和敬爲主 誨家人子弟 咸有禮度 鄕黨皆取則焉

39歲 壬申(1572) 丁妣尹夫人憂 一遵朱文公家禮

42歲 乙亥(1575) 逮夫永感 尤不求聞 與伯仲氏 鼎居汭江之東西 日以杖屨相從 伯氏有亭曰淸穎 仲氏有亭曰挹淸 先生則 構小室于楓山 率門徒數十人 以處之計 論經學卞正禮義而 每當花朝月夕 以詩酒往會 伯仲于兩亭上 怡然相樂 鄕人謂之 一門三孝

43歲 丙子(1576) 眉巖 柳先生 爲湖南巡察也 薦五賢于朝 先生其一也 遂 不就焉

44歲 丁丑(1577) 四月 日 撰內舅 杏堂尹先生行狀

46歲 己卯(1579) 時鄭汝立 矯誣飾詐 方有盛名 三南士子 莫不趨向 或勸以相從 先生曰 吾雖不見其人 一聞可知 其言行之相反 豈肯相從哉 南溪 李洁 東庵 李潑 淸溪 柳夢井 與汝立最爲親切 頻頻往來 先生勸其早絶 不信而相從矣 其後 果罹禍焉

51歲 甲申(1584) 府北有恥 迦智山中 得一區 洞壑幽邃 泉石淸潔 可居以終老 因臨溪築室 種梅植竹 以居之常 左琴右書 靜坐其中 讀孔孟程朱書 靡或小惓 又嘗手書 退溪先生 所論道學書 疏及 主客問答 等說一帙 每覽尋繹 未嘗釋手 其銳意求道 着跟實地 盖如此

54歲 丁亥(1587) 別築小庵於 絶頂之上 庵號曰 白雲 敎以子姪 餘暇習以射御曰 此亦六藝之事 其可忽諸

 

 

(3)壬辰倭亂時赫赫戰功

 

壬辰倭亂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되어 御駕가 서쪽으로 避難하자 선생은 서쪽을 바라보며고 통곡하며 3일 동안 밥을 먹지 않았다. 伯氏 仲氏冠山館 모여 義兵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먼저 집안 奴僕들을 徵發하니 百餘名이었으며, 고을에 檄文을 보내어 의병 200명을 모았다. 네 아들과 모은 병사를 거느리고 寶城에 도착하여 姊兄 朴光前 前縣監 任啓英 綾城縣令 金益福 公等의 군대와 합쳐 長水에 도착, 前府使 崔慶會 公의 군대와 合勢하여 錦山 茂州 두 고을의 적을 擊破하여 갑옷 칼 화살 등을 鹵獲하였다.

선생이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 여러 사람들은 선생을 白衣書生이라 軍旅에 대해서는 익숙하고 精通하지 못할 것이라 冷笑하였지만, 軍律嚴正하고 裝備食糧을 사사로이 마련하였으며, 計劃하고 決斷하는 것이 물 흐르는 듯 하였으므로, 龍城府使 尹安性 公내가 文緯世를 보니 그 충성의 지극함이 마음속에 쌓여 자연스레 겉으로 드러나며 등에 넘쳐흐르는 아름다움이 있다. 軍器를 단속하고 진을 쳐서 軍令을 시행하는 일은 곧 東方諸葛亮이다라고 하였다.

開寧 倭軍 殘賊과의 戰鬪에서는 세 번 싸워 세 번 후퇴하니 더 이상 追擊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반드시 적의 속임수임을 알았다. 해 저물 무렵 斥候兵의 보고로 왜적 일만 명이 매복하여 있음을 확인하였다. 우리 군사가 추격을 하지 않으니까 모두 가버렸다는 것이다. 孔子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라는 말을 나는 항상 잊지 않았으며, 또한 諸葛孔明正大하고 謹愼한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 때 都元帥 權慄 장군이 선생을 承旨白沙 李恒福 선생에게 紹介하여 義兵將으로 천거하였다.

60때인 宣祖 26年 癸巳(1593) 京城의 적 및 嶺南의 적을 치는데, 선생은 湖南運糧使兼任하여 두 곳의 軍糧補給하게 되었다. 그래서 노젓는 軍卒督促하여 급히 영남으로 運搬하도록 하였다.

배가 順天曳橋아래 이르렀을 때 倭賊 數萬 명이 갑자기 나타나 米船奪取하려 하였다. 그런데, 적들은 많고 우리 군사가 적음을 모두 매우 걱정하였다. 그 때 마침 해가 저물어 선생은 돌을 갯벌 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늘어놓고, 그 늘어놓은 돌 가운데 매를 대어 두고는 병졸들을 둘러서게 하였다. 이날 밤 天氣晴朗하여 우리 군사가 적음을 보고 침범하고자하면 비바람이 갑자기 일어나고, 물러가면 비바람이 그쳐 적은 함부로 침범해 오지 못했다.

이튿날 새벽에 선생은 潮水를 타고 兵卒을 풀어, 큰 바다 가운데서 왜적을 공격하면서 한참동안 크게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한 척 하고 달아나니, 적병들이 승리의 餘勢를 몰아 늘여 놓은 돌 가운데로 追擊해 들어왔다.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咫尺을 분간할 수 없었고, 잇따라 구름과 천둥이 사방으로 진동하니, 선생은 그 병졸로써 쌀 실은 배를 안전하게 보호하여, 갯벌가운데서 도로 나와 사방으로 적들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賊船은 또 번개와 천둥에게 공격당하여 완전히 掃蕩되었다. 병졸들이 축하하며 그 까닭을 물으니까 선생은 말하기를이것은 곧 諸葛孔明魚腹浦陣設置했던 魚腹陣이라는 것이다. 이 때를 당하여 怨讐 敵軍殲滅했으니, 퇴계선생이 나를 가르치신 은혜를 어느날인들 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軍中에서 명령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拱手하고 꿇어앉아 손수 글을 써서 내렸고, 깨우칠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을 다하여 숨기는 것이 없었으므로, 은혜와 권위가 함께 행하여져, 軍卒들이 감격하여 誠力을 다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天文에 밝아 軍事吉凶을 점칠 수 있었고, 河圖洛書變數에 익숙하여 賊兵의 많고 적음, 虛實眞情 虛僞명확하게 알 수 있었으며, 비록 보이지 않는 먼 곳이라도, 좁고 막히고 험하고 평이함을 지나가 본 것처럼 잘 알았기 때문에 군사를 지휘하여 나아가는 길이 符節같이 합당하였다. 그래서 府使 尹公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白衣書生이 어느 여가에 이러한 병법을 다 익혔는가.’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論語君子方面에만 局限되지 않고 여러 방면에 두루 통한다고 한 이 이와 같은 사람을 두고 말한 것이라 하였다.

62乙未年(1595)의 부름을 받고 대궐에 나아가 龍潭縣令除授되었다. 선생은 年老하여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곧 부임하였다. 龍潭嶺湖南 교통의 要衝地로서 이곳을 굳게 지키고 적의 공격을 막도록 한 것이다.

64歲 宣祖 30丁酉(1597) 龍潭縣令으로서 사람을 운봉에 보내, 雲峰에 군사를 배치하여 良峙의 길을 막아 만일의 事態에 대비하도록 하였으나, 雲峰의 원이 따르지 않았다. 얼마 뒤에 적병 10만이 양치를 넘어 雲峰陷落시키고 바로 南原으로 향했고, 蓼川 물을 그 성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니, 나라 將帥 楊元이 성을 버리고 도망쳤기 때문에 적은 바로 素沙에 올라갔다.

그래서 선생은 사람을 보내 南原雲峰의 흩어진 병졸 1000여명을 모아 良峙를 지키면서 뒤따라오는 적을 沮止하고 이웃 고을에 격문을 띠웠다. 그 때 선생의 아들 사위 조카들이 군사를 이끌고 모여들어 마침내 500명으로 守城軍을 삼아 境內 四方으로 出沒하여 遊擊하게 하고 500명은 몸소 이끌고 全州를 향해 모든 적들을 추격하여 패퇴시켰다.

庚子年(1600) 선생 67朝廷에서 坡州牧使除授하였으나 老病으로나아가지 않았고, 이해 313일에 別世하였다.

 

59歲 宣祖 25年 壬辰(1592) 4月 日 島夷陸梁竝進 先生與伯仲氏 共會淸灝亭 語及時事 愾然流涕 伯氏歎曰 時當不運 復逢亂離 將何以濟 吾恐其無與計事者 先生曰 吾昆季尙在 當戮力 王室掃除汚穢 且大事不謀於人 何待於外 仲氏曰 吾弟旣如是事 必可濟矣

及賊陷京城 大駕西行 先生西望痛哭 不食三日 因與伯仲氏 謀倡義旅 同往會于冠山館 先發家僮 僅百人傳檄 隣邑收得鄕中兵 亦二百人 先生有子六 曰元凱 曰英凱 曰亨凱 曰弘凱 曰汝凱 曰括凱 皆孝友兼備 先生領軍發行 顧謂長子曰 汝之伯父尙在 主廟家宜先奉養 不可遠離 且汝母猶在 善爲調護 遂與四子同行

遂作勤王之行 欲直向北 衆議皆曰 今七路皆陷 惟湖南獨存 糧餉兵卒 若非是道 無所辦出 不如移兵嶺南 先擊犯湖南之賊 豈非一機事哉 先生曰 京中宗廟所在而 今大駕去邠 臣無奔問 可乎 當先向京中 掃除汚穢 然後祗謁陵廟 肅淸宮禁 旋奉鑾輿 是吾之素志也 衆曰 夫全州太祖 妥靈之所 嶺南湖南之保障耳 若今失此則 糧餉器械 何所恃也 伯氏亦曰 宜從衆議 先生曰 謹受敎矣 於是 領軍至寶城 與姊兄朴公光前 縣監任公啓英合兵 時綾城縣令 金益福 亦率兵來會 兵聲稍振 任金二公謂 先生曰 吾以君爲 過於忘世者矣 不意今日 傑然爲義士倡也

時幕中參佐之人 軍中執戟之士 必擇戰兢者曰 聖人云 必也臨事而懼 吾取以爲式

行到長水 與前府事 崔公慶會 合而進破 錦茂兩邑之賊 崔公見先生 軍容器械靜肅 謂人曰 吾不意儒生若是矣

初起義時 衆以先生 爲白衣書生 不閑軍旅 皆冷笑之 諸邑守宰 亦 以儒兵迂濶 不爲助護 驕將惰卒 嗤其不能而 阻遏者有之 詆毁者有之 然先生不以爲嫌 治事自若而 軍卒器械餱糧 私自辦出矣

始自 錦茂討賊之後 軍器一不辦出 皆取於賊而用之 且隻甲寸刃一矢 亦不亡失 軍聲漸振 人莫不爲異

初任公啓英 以妙年高弟聲名 聞於遠近 是以歸附者尙多 至是見先生 軍務嚴整 莫不瞿然 任金二公 亦以糧餉 不足爲憂 先生常調其兵食自 足 軍中諸務 莫不就問 先生 亦爲之謀劃 剖決如流

留陣龍城也 府事尹公安性 見先生 軍政嚴肅 出語人曰 南來始見 一 白布衣 義士也 人問爲誰府事曰 吾觀文緯世 其忠厚之至 儲於中而發語 外 自然有 粹面盎背之美 且軍器團束 設陣行營 則東方一諸葛也 於 是 勸諭其邑諸士子 得兵五百餘人 傍邑諸人聞之 爭附者 亦二百餘人 皆曰 吾若非白衣義將 吾何與歸乎

及開寧之殘賊 三戰三退 先生使諸將 一無所追曰 此必有譎且觀之 至 日暮 塘報來焉 某處倭人 來伏者萬餘人 見吾兵不追 皆解去矣 衆聞 而大驚 問於先生曰 何以知其然而 不追也 先生曰 兩陣戰甘 彼無故自 退 必要我於危地也 其可追乎 孔子曰 必也臨事而懼 五常不忘而 且 諸葛孔明之正大謹愼者 良有以也

時權元帥() 以先生 介於承旨 白沙李公恒福 白沙薦先生以義兵將

60歲 宣祖 26年 癸巳(1593) 星州之賊旣平 白沙 李恒福 啓天將及權元帥軍 討京城賊 左右義兵及虎標兵 討嶺南賊而 以先生 兼湖南運糧使 以給兩處兵 不足之糧 又招其兵 助討幸州之賊 朝廷從之

幸州之賊旣平 權元帥 至南原 議討嶺南諸賊 方以糧餉不足爲憂 先生急促漕卒運米嶺南 至順天曳橋下 遇賊數萬 欲奪米船 衆皆以我寡 寇衆爲憂 時適日暮 先生 以石排於浦中最深處 檥船於陣石中 以兵自繞 是夜 天朗氣淸 賊見其單弱欲犯則 海上風雨忽起 退則風雨忽止 賊 以故不敢來侵矣 翌曉先生乘潮 縱兵擊倭於大洋中 大戰良久 佯敗而走 賊兵乘勝追入陣石中 風雨大作 咫尺不辨 繼以雲雷四震 先生以其兵 護全米船 還出浦中 四圍攻之賊船 亦爲雷電所擊 蕩盡無餘矣 漕卒賀因問 曰 此何以 其然也 先生曰 此乃孔明所設 魚腹浦者也 當此之時 讐賊殲殄而 老先生訓敎之恩 何日忘之

先是 元帥權公 軍中可褒可賞者 聞于朝 先錄先生功績 先生聞之曰 余何貪天之公哉

凡在軍中 有所令則 必拱手危坐 親自書以下之 有所諭則 必盡款曲 無所隱伏 於是恩威竝行 軍中莫不感激 盡其誠力矣

行軍時則 必先送副將 然至於赴戰則 必尋先士卒 從者曰 以上將與

下卒同隊 似不可焉 且無奈太苦乎 先生笑曰 吾豈臨戰陣無勇哉 蹈危履險 死生當以之

臨陣對敵 矢石落於左右 了無所怕 應聲赴賊 亦無忌憚 衆皆以爲難 先生曰 聖人云 白刃可蹈 有何難哉 我許國之心 死有不已 盖中庸不可 能也 白刃可蹈 吾所服膺者也

敎兵 各以所率副將 從便宜以行之 嘗曰吾常愛 張巡之論 其言曰 今 與胡虜 雲合鳥散 變態不常 數步之間 勢有同異 臨機應猝 在於呼吸之 間 動詢大將 事不相及 非知兵之變故 吾使兵識將意 將識士情 投之以 往 如手之使指 兵將相習 人自爲戰 不亦可乎 吾以此 爲用兵之確論

明於乾象而 能占戎事之吉凶 習於河洛變數而 明知賊兵多寡 虛實情僞 雖地之不見處 隘塞險易 如所經歷 故指揮軍師 所從程途 若合符節 府使尹公歎曰 白衣書生 何暇習此哉 旣而復曰 語云 君子周而不器 若人之謂也

及其運糧也 無論水陸 官義兵莫不調給而 或激勵縣邑守宰 或勸諭鄕 井富民 絡繹不絶矣 然其運糧於諸陣也 不能一一 親自檢束以行 或代以 子弟 或代以知心可堪者 亦無愆期之勢

拘於運糧故 雖不在軍中 然或運籌於所在處 能決勝負於諸陣之中而 使人往復 內外相應 是以左右義將與虎豹將 及先生之副將 李忠良等 當 其臨陣對敵之日 應機合變之術 皆待先生之指揮也

61歲 宣祖 27年 甲午(1594) 前縣監 朴公光前 上書東宮 首薦先生 朝廷詔諸義兵 皆屬 忠勇將軍 金公德齡故 先生反故居而 與諸子 靜處白雲菴 着意性理之書而已 前日戎事 若不知也 玆後朝朝 常登巖臺 北望再拜 蓋巖臺者 迦智山下 勒龍洞 白虎江邊 山峨水駛 巖石平衍 可坐數十人 傍植槐柳數十株 卽先生 釣臺盤桓之所而 有石竅藏 鈆槧之遺痕故 名其臺曰 思君臺 常有詩以寓戀君之意焉 潛心理學 老而彌篤 自釋兵權以後 或有來言 功罰之事則曰 以我無能之將 幸賴有能之兵 予何有功焉 因麾而使不復焉 然常忽忽 有不平之氣 見於形色 人怪而問之 先生曰 讐賊之入寇也 宗廟社稷 一炬成灰 是天理已絶 人道已滅 實臣子萬世不忘之憤也 當一切灑之 以雪其恥 今尙不得如意 豈非醉生者也

62歲 宣祖 28年 乙未(1595) 春承召赴闕 肅謝拜龍潭縣令 先生年老 欲謝不往 以兵革未息 國憂方殷 則到官 蓋龍潭 嶺湖往來之要衝也 使爲防守 以備要害 遏絶兇鋒

*時倭奴 退據南海等地 先生自到官後 0察餘賊 親率吏卒敢勇者 循行境內盡逐之 於是依山者 奠土而隣邑餘民 亦聞之相謂曰 白衣義將 來到龍潭 必有神令 制賊之術 將有來蘇之望 稍稍轉進而來 流民携其妻子而來者亦多 皆一以賑而恤之 一以勤而撫之

始自今春 勸民墾土耕農 使具生業 亦使吏卒 禁察異國之來覘者 由是行者 去干戈居者 里門不閉矣

63歲 宣祖 29年 丙申(1596) 因莅龍潭

64歲 宣祖 30年 丁酉(1597) 使人於雲峰 勸以兵遮絶良峙之路 以備不虞 雲峰守不從 先生欲設防守於此而 兵不滿百 慨恨不已 頃之賊兵十萬 果踰良峙雲峰 直向南原 以蓼()川灌其城 天將楊元 棄城遁走 於是賊直北上素沙矣 先生遂遣人 收南原及雲峰散卒 得千餘人 防守良峙 以遏後繼之賊 傳檄發傍縣兵 時先生之子壻侄 亦率兵來會 遂以五百人爲守 城 軍出沒四境 以爲遊擊 以五百人 親率向全州 追敗諸賊

天將楊鎬 破倭敵於素沙 其副將劉總 因其兵威 將逐嶺南諸賊 路過湖南 先生 時在全州 與之共歸龍潭 見境內 肅然 歎曰 非太守之賢 安能如是

自防守軍遏良峙後 賊兵後繼者 無不摧敗 留屯四十餘日 賊聞之不敢踰良峙矣 因罷焉 蓋良峙防守者 與順天曳橋 石陣同者也 厥後 先生毁其石 泯其蹟曰 昔孔明之設於魚腹() 陸遜幾死 設於五丈 仲達發歎 是皆孔明之 佐漢成帝業者也 金吾設於兩處而 讐賊未滅 能無愧乎

時宣靖二陵 爲賊所汚 先生登城痛哭曰 此其時也天也 臣子百世之 恥 何日忘之

65歲 宣祖 31年 戊戌(1598) 因涖龍潭

66歲 宣祖 32年 己亥(1599) 先生以老病 解紱歸鄕而 家有一病鶴矣 以 此姑爲遣世之朋 一日忽放於野外 爲童子所傷 遂作失鶴賦以寓意焉

67歲 宣祖 33庚子(1600) 春 朝廷 以公除坡州牧使 病不就 是年易簀 三月十三日也

 

配貞夫人 李氏 有端莊靜肅之儀

墓在 長興府北 有恥 勒龍洞 巽坐之原 配位 同麓雙墳 有碣

肅廟 (28) 壬午(1702) 太學章甫上疏 建祠月川

英廟 (10) 甲寅(1734) 太學章甫 以祖孫 並享之意 發通 合享 三憂堂忠宣公

正廟 (9) 乙巳(1786) 賜額致祭 己未 贈兵曹參判 因三道儒疏

純廟 (33) 癸巳(1833) 合享 羅州 忠莊祠

年譜先生 五代孫 進士 文德絅纂輯한 것이다.

 

 

3. 先生文學

 

선생이 남긴 문학 작품은 遺稿다섯 편과 28한다.

1)

(1)思君臺 - 戀君 憂國衷情

 

前川秋月引閑步 가을 달에 냇가를 한가로이 거닐면서

夜上巖臺望紫薇 밤중에 암대 올라 대궐을 바라보노라

北闕迢迢消息斷 북쪽 대궐 멀고멀어 소식이 끊겼으니

終南渭水夢依依 종남산과 위수사 꿈속에 아련하네

 

詩 細注年譜 61歲條에 보면前 縣監 朴光前 公東宮에게 上疏하여 제일 먼저 선생을 推薦하였는데, 朝廷에서 詔書를 내리기를 여러 義兵들을 모두 忠勇將軍 金德齡 公에게 所屬시켰으므로,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와 여러 아들과 함께 白雲巖에 조용히 거처하면서 性理學에 뜻을 두었고, 전날의 戰爭에 관한 일은 마치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이후로 아침마다 항상 巖臺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고 재배하였다. 巖臺長興府 북쪽 勒龍洞 白虎江 가의 산이 높고 물살이 빠른 곳에 있었는데, 바위돌이 평탄해서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었고, 또 그 옆에는 槐木과 버드나무 수십 그루가 서 있었기에 곧 선생의 낚시터요 소요하는 곳이었다. 바위굴에는 文筆을 보관한 흔적이 있었으므로, 의 이름을 思君臺하였으며 이곳에서 시를 지어 임금을 생각하는 뜻을 나타내었다고 하였다.

 

 

(2)無題

 

山翁獨坐一山頭 산 늙은이 혼자서 山頂에 올라오니

長嘯深山萬古秋 깊은 산 휘파람은 만고의 가을이라

宇宙莫將塵事撓 속된 일로 온 세상을 흔들지 말게 하라

胸中何處不山頭 가슴속 어느곳이 山頂이 아니겠나

細注이 절구 한 수는 흩어진 원고 가운데 수록되어 있었으나, 제목이 누락되었다.’고 하였다. 선생은 61세 때 戰亂중이었지만, 朝廷으로, 自身이 거느리고 있던 義兵들을 모두 金德齡 將軍에게 맡기고, 고향으로 돌아와 隱居하면서 白雲巖에 올라思君臺를 지었는데. 아마 이 도 그 때에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쟁으로 나라의 위태로움과 혼란이 한창인데, 兵法戰術能熟將帥赤手單身으로 고향에 돌아와 자연을 벗 삼아 逍遙하고 있다는 것은 선생의 본뜻일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世俗의 일로 나라를 흔들지 말라고 하여, 답답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라 생각된다.

 

 

(3)金剛山韻

上臺臺上火輪流 대위에 올라보니 태양빛이 흐르는데

曉踏層空放遠遊 새벽의 층층구름 저 멀리 떠다니네

十二瀑從銀漢落 십이폭포 따라서 은하수 떨어지니

萬千峯入碧虛浮 천만봉이 허공에 떠 있는 듯하다네

 

龍潭霧起風傳雨 구룡연에 안개이니 비바람 전해오고

雲壑氷生夏亦秋 깊은 골에 얼음 얼어 여름 또한 가을인데

杯視東溟天地小 술잔들고 동해 보니 천지도 작은 듯

朗吟終日興悠悠 종일토록 읊조리니 흥취가 절로나네

 

 

(4)無題

 

三朝從事老成人 세 임금을 모셨던 노성한 사람이

一去如何便隱淪 한번 떠나 어찌하여 세상밖에 숨었는고

休道江湖心魏闕 강호에서 조정에 마음 둔다 하지말게

未將霖雨澤殷民 아직까지 백성에게 은택이 없었다네

苟辭榮辱非忘世 영욕을 사양했지 세상 버림 아니라오

强取安閑豈爲身 억지로 편안함이 어찌 몸만 위함이랴

聖主能從堯舜志 성주께서 요순의 뜻을 따르신다면

阿衡不必死耕華 이윤이 밭만 갈다 죽지는 않으리라

細注이 절구 한 수는 흩어진 원고 가운데 수록되어 있었으나 제목이 누락되었다고 하여無題라 한 것 같다. 一時的으로 落鄕하여 조정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결코 나라와 백성들을 저버린 것이 아니며, 憂國衷情은 추호도 변할 수 없다는 심정을 吐露하였다.

 

(5)千里書回碧樹

 

有人如玉隔天涯 옥같은 사람이 하늘가에 있는데

碧水浩浩雲悠悠 푸른물 넓디넓고 뜬구름 한가롭네

年來消息雁亦希 근래에 소식전할 기러기도 오지 않고

片夢夜夜飛秦樓 밤마다 토막 꿈만 秦樓에 날아드네

 

今朝寬我十年悔 오늘아침 나에게 십년회포 풀어주려

一封音書千里投 천리 밖 一封 音書 보내어 왔다네

分明紙上數行字 종이에 쓴 몇 줄의 글자가 분명한데

說盡心中多少愁 심중의 온갖 시름 모두 다 말했다네

 

披來宛見古人面 펴보니 고인 얼굴 보는 듯이 완연한데

始覺平生交道優 평생을 사귄 도리 넉넉함을 느끼겠네

是日金風吹碧樹 이 날에 푸른 나무 가을바람 불어와

半夜霜葉秋聲稠 한밤중 가을 소리 단풍잎 떨어지네

 

煙光深得別恨長 자우룩한 雲霧속에 이별의 한 깊은데

物色摧白離人頭 물색은 떠난 이의 백발을 재촉하네

逢辰却憶舊年遊 때 만나니 지난 날 풍류를 생각는데

一葉吳門江上舟 오창문 강 위에는 일엽편주 떠나가네

 

淸詩美酒樂事多 고상한 시 좋은 술에 즐거운 일이 많아

蘆葦花邊閒去留 갈대꽃핀 강가에서 한가로이 거니네

人間離別有今古 인간의 이별이란 예나 이제 있는 것

不改年年秋 해마다 가을은 변함 없이 닥쳐오네

 

從前每恨一書無 종전에는 편지 없어 한스러워 하였으나

得書誰知增我憂 편지 받고 근심 더함 누가 알 수 있으랴

一回看書一回悲 한통의 편지보고 한편으로 슬퍼하니

渺渺離心天北陬 아득한 이별 마음 하늘 끝 북쪽이네

瑤絃音斷不見人 음률소리 끊어지고 사람도 안 보이고

兩地迢迢月如鉤 두 곳은 멀고먼데 달모양 갈고리네

 

細注이 절구 한 수는 흩어진 원고 가운데 수록되어 있었으나 제목이 누락되었다고 하여無題라 한 것 같다.

 

 

2)

 

(1)求放心

 

先生自身이 이전에 學問要諦를 미처 알지 못했을 때, 어지럽게 外物推究하여, 소경이 지팡이로 급하게 땅만 두드리는 듯하였으므로, 헛되게 진리 탐구의 成功에만 급급하다가, 잃어버린 마음을 찾으라는 가르침을 吟味하고는 孟子訓戒欽慕하였다. 이미 잃어버렸던 마음을 다시 머리속에 들어오게 하여, 인간의 착한 本性으로 돌아가게 하는 길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萬物을 살리는 主宰者가 마음속에 있음을 생각하니까 참으로 밝고 환하여 私心이 없고 어긋나지 않았다. 고 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無時로 출입하기 때문에 가슴 속에 굳게 잡아 두는 경우가 거의 없고, 하물며 誘惑하는 것이 너무 많으므로, 서로 타투어다투어 틈을 비집고 들어오며, 냄새와 맛에 이끌리고 또 아름다운 노래 소리와 女色에 유혹되어 버린다. 그래서 外物을 따라 돌아올 줄 모르고, 날마다 마음이 肉體奴隸로 되는데 汨沒하여 텅 빈 가슴 속에는 主人이 없게 되고, 다만 한 덩어리의 身體만 남아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니, 사리에 어두운 부질없는 老洫이 되었다.

 

曩余學未知要 紛騖外而逐物 徒遑遑其墑 謾責功於探賾

味求心之格訓 欽亞聖之提撕 將已放使入身來 禀復草之在玆

顧活物主宰乎方寸 妙虛靈而不爽

然出入之無時 鮮操存於腔內 矧來攻之甚衆 競投間而抵隙

旣被引於臭味 又見誘於聲色 羌逐外而忘返 日汨沒於形役

曠靈臺兮無主 只塊然之軀殼 視不見兮聽不聞 徒鶻()而老洫

 

그러나 本體는 없어지지 않아, 밝게 찾으면 이것을 얻을 수 있으므로, 君子는 위태로울 때 더욱 경계하여, 스스로 힘써서 반성하며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屋漏에 처해 있어도 조심하고 두려워하기를 마치 깊은 물에 하는 듯, 엷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며, 넘어지고 자빠질 때에도 조심하고 살펴서 가득한 물그릇을 받들 듯, 값비싼 을 잡듯이 하여야 한다.

瞬息間邪慝한 마음이 일어날가까 염려하면서, 오직 으로써 막으려하고, 일을 할 때 털끝만큼의 차질이 있어도 로써 스스로를 自制하며, 조금이라도 치우치거나 기울어지는 데로 옮겨가면 곧 中正으로써 다스리고, 잠시라도 어둡고 게으른 데로 들어가면 곧 불러 깨움으로써 서두어들이며, 잠시라도 소홀하지 않아서 굳게 가진 마음을비둘어지게 하지 말 것이다.

 

然本體未嘗泯滅 諒求之卽斯得故 君子戒之於惟危 勗自反而警惕

處屋漏而戰兢 若臨深而履薄 際顚沛而洞燭 如奉盈而執玉

思頃刻之起邪 要而敬而閑之 事毫釐之在差 務以禮而自持

少轉移於偏倚 便律之而中正 纔流入於昏怠 奄收之而喚醒

靡造次之或忽 使操存而無遹

 

참으로 存養에 오래 힘쓰면 어찌 疎忽하고 輕率한 일이 일어나겠는가. 마음대로 하고 싶은 생각을 하지 말고, 混沌天理를 온전히 하여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神妙한 작용을 이루면 이것이 放心을 거두어들이는 지극한 공이고, 참으로 학문하는 急先務가 되는 것이다. 어찌 저 昏迷하여 스스로 抛棄하며 支離滅裂함을 달게 여겨, 어지럽게 하늘을 나르고 못에 빠지는 듯이 감정이 觸發하여 제 마음대로 慾望에 치우쳐, 슬프게도 자신을 반성할 줄 모라서 마침내 본심을 잃고 利慾에 사로잡혀 꽉 막혀버리니, 내가 이것을 懲戒하고 두려워하여 조심하도록 하고자 한다.

먼저 혼자 있을 때 삼가는 공부를 하고, 자세히 省察하여 깊은 이치를 깨닫도록 하며, 멀지 않아 회복할 것을 기해, 생각을 가까이 하고 절실히 물어 한 마음으로 制約해서, 공경하는 마음을 굳게 가지도록 할 것이며, 잠간이라도 放肆할가봐 두려워 짧은 을 지어 스스로 살피도록 한다.

 

苟存養之力久 豈胡亂之或起 絶飛揚0念 全混淪之天理 *

拱天君於光霽 臻妙用於虛有 是收放之極功 誠學問之先務

胡彼昏之自棄 甘滅裂而鹵莽 亂天飛與淵淪 紛觸情而縱慾

哀莫知夫反求 卒梏亡而茅塞 余懲是而惕厲 先做工於謹獨

務鞭辟而近裏 期不遠而能復 日近思而切問 約一心於持敬

恐斯須之或肆 作短箴而自警 箴曰

 

顧身有主 몸을 돌아보면 주인<마음>이 있는데

神明不測 신령스럽고 밝음이 예측할 수 없다네

操存舍亡 굳게 가지면 있고 버린다면 없어지며

出入無迹 나가고 들어옴이 자취가 없다네

苟或不求 참으로 혹시라도 구하지 않는다면

一息千里 한순간에 천리만리 달아나 버린다네

晷刻放之 잠시라도 방심하고 있는다면

其存寡矣 그 존재가 적어진다네

匪敬曷守 공경하지 않는다면 어찌 지키겠는가

整齊嚴肅 마음을 가다듬고 엄숙하게 가지며

庶幾惺惺 맑고 똑똑하게 정신을 차려야

久而勿失 오래도록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2)爲仁由己

 

[論語 顔淵] 첫째 顔淵問仁한대 曰 克己復禮爲仁이니 一日克己復禮天下歸仁焉하나니 爲仁由己而由人乎哉라 있고, 朱子 註仁者本心之全德이라 勝也謂身之私欲也反也禮者天理之節文也爲仁者所以全其心之德也蓋心之全德莫非天理而亦不能不壞於人欲이라 爲仁者必有以勝私欲而 復於禮則事皆天理而 本心之德復全於我矣猶與也又言 一日克己復禮則 天下之人皆與其仁이니 極言其效之甚速而至大也又言爲仁由己而 非他人所能預又見其機之在我而 無難也日日克之하야 不以爲難則 私欲淨盡하고 天理流行하야 而仁不可勝用矣리라 程子曰 非禮處便是私意旣是私意如何得仁이리오 須是克盡己私하야 皆歸於禮라야 方始是仁이니라 又曰 克己復禮則 事事皆仁이라 曰 天下歸仁이라하시니라 謝氏曰 克己須從性偏難克處克將去니라했다.

 

위와 같이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지,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것에 대해 선생은 다음과 같이 論理를 전개하였다.

하늘이 을 내린 지극한 도리는 참으로 모든 사람이 다같이 얻은 것이나, 그러나 사람이 사사로운 욕심을 이기지 못하면 누가 이 安宅에 살겠는가. 로 돌아가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을 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人道의 지극히 큼을 살펴 한결같은 마음의 온전한 덕을 충실하게 해야 한다.

사람으로 인해 이 있음을 터득하고, 마음속에 덕을 깊이 쌓아 없어지지 않게 해서, 내가 을 하고자 하면 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어찌 스스로 힘쓰고 勸勉하지 않겠는가. 幾微를 알기가 어렵지 않으니, 참으로 욕심을 制止하는 것이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君子의 독실한 정성은 항상 간절하고 부지런히 스스로 닦아야 하는 것이다.

 

惟降衷之至理 諒衆人之同德 然人慾之未克 孰能居此安宅

悟復禮之由己 知爲仁之有術 原人道之至大 實一心之全德

至由人而有德 蘊方寸而不泯 我欲仁卽斯至 盍自勗而自勉

斯見幾之無難 信在我之制欲 肆君子之篤誠 恒拳拳於自修

 

 

懼或移於物誘 功必密於反求 豈克己之無準 要以禮而自律

憂蔽前之中遷 思外方而中直 慮物化之亡正 期存誠而主一

動必遵乎順理 言必循乎禮法 窮晨夕而致思 逮動靜而必察

平物欲之至險 安人心之甚危 明我天之皦日 炯中襟之無私

交天理之流行 藹心君之洞澈 玆由己而爲仁 務成德而上達

豈啻三月之不違 優可入於廣居 何賤子之躁妄 矇不知夫復初

紛巧言而令色 肯處約而自守 惡死亡而不仁 寔惡醉而强酒

幸余學之爲己 悟仁者之斯人 得取譬之能近 體出門之見賓

期莠盡而苗長 思醅化而醴醇 惟四勿之學顔 冀一登於聖域

然久能之或鮮 懼明鏡之塵蝕 誦夫子之遺訓 矢永復而無斁

 

(3)道不遠人 <以下 略. 다음에 繼續 >

 

4.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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